베트남-프랑스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30번째 줄:
결과적으로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었다.<ref name="신승하"/>{{Rp|335~337}}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7월 19일 – 1871년 5월 10일)에서 패한 이후,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기도하고, 1881년에 프랑스 의회는 240만 프랑을 베트남에서 군비로 사용하도록 승인하였다. 1881년말, [[홍 강]] 거슬러 올라가고 있던 프랑스인이 [[흑기군]]에 저지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총독 르 밀 드 비렐 제독은 갑술조약(또는 제2차 사이공 조약, 1874년) 위반을 문책하기 위해 프랑스 교지지나 해군함대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fr:Henri Rivière|Henri Rivière]]) 해군 대령을 하노이에 파견하였다. [[1882년]]초에 하노이에 도착한 리비에르는 교섭이 무익하다고 판단해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1882년 4월에 [[하노이]]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해 [[1883년]]에는 흑기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7~339}} [[뜨득]]의 원군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통킹 지방에 출병하였고, [[흑기군]]도 떠이 선(西山)을 거점으로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한편, 1882년에 [[청나라]]의 [[이홍장]]은 프랑스 공사 보우리(Bou-ree)와 [[톈진]]에서 담판을 시작하여 가조약 3조에 합의하였다. 즉 중국은 군대를 [[운남]], [[귀주 성]]으로 철수시키고, 프랑스도 베트남을 침략점거하지 않으며, 베트남 국왕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보승(保勝)을 개항하여 중국과 프랑스가 여기에서 무역하며, 또한 이곳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7~339}} [[톈진]] 담판의 가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군은 철군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베트남 북부의 변경을 순시하였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흑기군]]은 이들과 충돌을 일으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ref name="신승하"/> {{Rp|337~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