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0번째 줄:
|교전국1=[[조선]]
|교전국2=[[일본]]
|지휘관1=동래부사 [[송상현 (1551년)|송상현]]† <br /> 대장(代将) [[송봉수]] <br /> 양산군수 [[조영규 (조선)|조영규]]† <br /> 울산군수 [[이언성]] <br /> 동래교수 [[노개방]] <br />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 (조선)|이각]] <br /> 조방장 [[홍윤관]]† <br />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 (1534년)|박홍]]
|지휘관2=[[파일:Japanese crest Hana Kurusu.svg|20px]] [[고니시 유키나가]] <br /> [[파일:So clan mon2.svg|15px]] [[소 요시토시]] <br /> [[파일:Japanese Crest Matura mitu Hosi.svg|15px]] [[마쓰라 시게노부 (1549년)|마쓰라 시게노부]] <br /> [[파일:Japanese crest Arima Mokkou.svg|15px]] [[아리마 하루노부]] <br /> [[파일:Japanese crest Arima Mokkou.svg|15px]] [[오무라 요시아키]] <br /> [[고토 스미하루]]
|병력1=2500~3000명 <br /> 군민 포함 2만 명
20번째 줄:
== 전투 준비 ==
동래 부사
== 전투 과정 ==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일본군은 [[부산]] [[동래성]] 앞으로 몰려들었다. 경상좌병사 [[이각 (조선)|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 (
이에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결국 전투가 시작되어
성이 뚫리고
[[일본]]의 지휘관은
== 결과 및 영향 ==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부산진성]]과
{{임진왜란 전투 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