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sadal (토론 | 기여)
→‎저서 및 유묵: 안중근 태극기 이미지 추가
조단향 (토론 | 기여)
67번째 줄:
==== 초기 활동 ====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지은 《안응칠역사》에는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 9년 동안 한문을 익혔다. 14세 되던 무렵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므로 나는 애통한 나머지 병을 앓다가 반년이라 지난 뒤에야 회복되었다"고 하여 조부 안인수로부터 한학을 배운 사실을 술회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화서학회 측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고석로의 제자이기 때문에 화서학파라며 그 근거로 "3년 동안 안태훈 자택에 초빙된 한문 가정교사는 후조 고석로가 확실하다는 단정적 추리이다. 물론 명시적으로 "안중근은 고석노에게서 훈육을 받았다"는 부류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 논증한 여러 내용의 증거를 서로 연결하면 명시적 기록에 거의 같으며, 비록 추리이지만 기록된 자료에 의한 연구와 버금가는 결론에 도달함을 알 수 있다"며 아전인수 격의 논리를 펴고 있다.<ref>정우택, <安重根 의사의 師承關係와 華西學脈의 淵源 연구>, 《화서학논총》6, 화서학회, 2014, 354쪽.</ref>
 
=== 소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