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Hamemers (토론 | 기여)
Hamemers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7번째 줄:
[[884년]] 형 샤를로망이 죽었을 때 그는 5세의 유아였으므로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동프랑크의 [[카를 3세|샤를 3세 르 그로]]([[카를 3세|카를 3세 비만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네우스트리아]] 백작인 [[로베르 4세]]의 외손자로, [[외드]]와 [[로베르 1세]]의 외조카였지만, 그는 단순왕 샤를의 후견인이 되었다. [[쾰른]]의 대주교 위그는 귀족들이 추대하는 인물 대신, 어린 샤를의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샤를의 당숙이자 [[동프랑크]]와 [[이탈리아의 국왕]]이기도 했던 [[카를 3세|샤를 3세 르 그로]]을 찬성했다.<ref>그리하여 프랑스 역사에는 두 명의 샤를 3세가 존재하게 되었다.</ref>
 
[[887년]] [[11월]] [[카를 3세|샤를 르 그로]]가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 뒤에,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바이킹]]을 퇴치한 데 공을 세운 로베르 가문의 [[외드]]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885년]]~[[886년]] [[파리 시]]에 침투한 [[바이킹]]을 물리쳤던 [[외드]]는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이]]의 외손으로 아득하게나마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한편 [[888년]] 초, 새로 [[서로마]] 황제가 된 [[스폴레토의 귀도 3세|귀도]]는 샤를을 지지하였다.
 
=== 즉위 ===
23번째 줄:
[[파일:Charlesthesimple.png|썸네일|오른쪽|140px|단순왕 샤를 3세, 16세기 작]]
 
[[889년]] [[6월]]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라눌프 2세]]를 찾아가 [[외드]]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여 포섭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스폴레토의 귀도 3세|귀도 3세]]는 [[아키텐]] [[공작]]이자 [[아키텐의 군주|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 (아키텐)|라눌프 2세]]에게 샤를 르 생쁠의 보호를 부탁했다. 샤를은 공작이자 자립한 [[아키텐의 군주|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 (아키텐)|라눌프 2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893년]] [[1월 28일]] [[랭스]]의 [[대주교]] 풀크와 다른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랭스 되었다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뒤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샤를을 [[서프랑크 왕국]]이 진정한 왕으로 내세워 왕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한편 친척이기도 했던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는 사자를 보내 샤를 르 생쁠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샤를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샤를 3세의 지지파와 [[외드]] 지지파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전쟁은 [[894년]] [[3월 31일]]에 잠정 휴전하였다.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는 미성년자가 영토를 제대로 다스릴수 있느냐며 소년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묻고는,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895년]]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화가 난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는 [[외드]]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승인하였다. 이어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 지원 요청 역시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37번째 줄:
[[898년]] [[로트링겐]]의 귀족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 등과 내통하여 [[로트링겐]]을 침공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노르만 족]]과의 싸움에서 이겨 다량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러나 종종 이겼을 뿐 계속된 전투에서 바이킹에게 패하게 된다.
 
[[900년]]대 초부터 [[노르웨이]]에서 온 [[롤로]] 등의 [[바이킹]]이 [[프랑스]] 서북부와 [[노르망디]]를 약탈했다. 샤를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907년]] [[4월 19일]] 또는 [[5월 19일]] [[로트링겐]] 출신 [[인겔하임]] [[백작]]인 이멘티가르(Immedinger)와 부인 라그네힐드(Reginlind)의 딸로, 샬롱 쉬르 마른의 주교이자 [[캄파네]] [[백작]]인 브레브 2세(Beuve II, 일명 보보)의 누이인 프레데루나와[[프레데루나]]와 결혼했다. 프레데루나의 친정 이모가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마틸다였다. 이 결혼으로 그의 영지를 노리던 [[하인리히 1세 (독일)|하인리히 1세]]나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레데루나는[[프레데루나]]는 딸만 6명을 낳고 [[917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 아들을 원했던 단순왕 샤를은 [[919년]]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재혼하였다.
 
[[911년]] [[9월 24일]]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4세 (동프랑크)|유아왕 루트비히]]가 18세로 죽자 그는 루트비히의 사촌임을 내세워 [[동프랑크]]와 [[로트링겐]]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였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샤를을 지지했고 그는 로트링겐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한편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아르눌프의 외손자였던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추대했다. 유아왕 루트비히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츠벤티볼트에게는 어린 서자들만이 있었다. 그러자 샤를 르 생쁠은 자신이 유아왕 루트비히의 가까운 친척이자, 정당한 상속자임을 주장하며 [[동프랑크]]를 침공했다.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를 받드느냐 여부를 놓고 논쟁이 발생했고, [[로트링겐]]의 [[하인아우트]] [[백작]]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레니에 1세]]는 [[콘라트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샤를 3세의 지지를 선언, 샤를을 왕으로 받들었다.
 
그는 [[로트링겐]]에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직접 다스릴 수는 없었으므로, 프레데루나의 부모인 이멘티가르와 라그네힐드, [[로트링겐]]의 귀족으로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 대머리왕]]의 사위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을 [[로트링겐]] [[공작]]으로 임명해 사실상 [[로트링겐]]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레니에 1세]]는 마스(Maasgau) 백작 기셀베르트와 황제 [[로타르 1세]]의 딸 이멘가르드의 아들이었고,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레니에 1세]]의 부인 에시나다(Hersinda)는 샤를 르 생쁠의 할아버지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 대머리왕]]의 서녀였다. 그럼에도 샤를은 [[로트링겐]]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각별히 신경을 썼다.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레니에 1세]]는 [[로트링겐]]의 귀족들과 폭동을 일으켜 [[츠벤티볼트]]를 몰아냈기에, 샤를 3세는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레니에 1세]]를 불신하였다.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레니에 1세]]는 자신이 사망하는 [[916년]]까지 [[로트링겐]]의 [[공작]]이자 섭정으로 대신 로렌을 통치하였다.
 
[[909년]] 샤를은 자신의 누이인 [[이르멘가르트 (서프랑크)|서프랑크의 이르멘가르트]]와 이브레아의 베르너(Werner)의 딸 쿠니군데를 [[로트링겐]]의 귀족, [[로트링겐의 비게리히]](Wigeric of Lotharingia)와 결혼시켰다.
 
==== 바이킹과의 조약 체결 ====
줄 50 ⟶ 52: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으로 [[롤로]]와 [[바이킹]] 족에게 노략질을 일삼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노르망디에 정착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샤를은 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그의 부하들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롤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샤를의 봉신이 되었다. 조약 체결을 전후해서 [[로베르 1세]]는 막후에서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이 체결되게끔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바이킹 족과 꾸준이 싸워온 [[로베르 가문]] 사람들과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샤를이 [[로렌]] 지역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홀대하자 귀족들은 반발했다. [[918년]]부터 그의 지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안 [[독일]]의 [[하인리히 1세]] 등은 [[서프랑크]]의 변경을 침략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했다. [[919년]] [[10월8월]] [[잉글랜드]]에 결혼 동맹을 제의, 그해 [[8월 17일]]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결혼하였다. 한편 [[로트링겐]]의 귀족들을 총애했고, 그 중에서도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 하가노(Hagano)를 중용하였다.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분개했다. 로트링겐 내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귀족들이 나타났다. 조카사위가 되는 비게리히,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인 하가노 등 소수만이 그를 지지했고,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공작의 사후, 로트링겐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소극적 지지로 돌아선 귀족들이 나타났다.
 
[[919년]] [[로트링겐]]에서 샤를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하였다. [[920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독일 왕국]]을 침공하였으나 [[보름스]] 근처 [[페데르스하임]]에서 [[독일의 군주|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 (독일)|하인리히 1세]]의 군대에 의해 격퇴당했다. [[920년]] 샤를의 로트링겐 집중 및 [[하가노]] 편애에 반발하여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랭스 대주교 헤르베우스(Herveus)의 중재로 곧 진압되었다. [[921년]] [[7월 11일]] 샤를 3세는 [[독일의 군주|독일 국왕]] [[하인리히 1세 (독일)|하인리히 1세]]와 [[로렌]]에서 만나 ''우정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 정변과 투옥 ====
[[파일:Karel Rudolf.jpg|thumb|left|140px|샤를의 왕관이 귀족들에 의해 박탈되는 장면]]
[[922년]] [[로렌]]에 침입한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를 상대하여 겨우 이기고 화약을 체결한 뒤 돌아왔다. 그는 [[로타링기아]]의 군사와 병력에 주로 의존하였다. 샤를이 [[로트링겐]]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소외시키자 [[920년]]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샤를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922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외드]]의 형제인 [[로베르 1세 (서프랑크)|로베르 1세]]를 왕으로 뽑았다. [[900년]]대 이후 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랭스 대주교 풀크는 그해 [[7월 2일]]에 사망하였다.
 
[[922년]] [[로렌]]에 침입한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를 상대하여 겨우 이기고 화약을 체결한 뒤 돌아왔다. 그는 [[로타링기아]]의 군사와 병력에 주로 의존하였다. 샤를이 [[로트링겐]]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소외시키자 [[920년]] 서프랑크의 귀족들은 샤를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922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켜, [[외드]]의 형제인 [[로베르 1세 (서프랑크)|로베르 1세]]를 왕으로 뽑았다. [[900년]]대 이후 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랭스 대주교 풀크는 그해 [[7월 2일]]에 사망하였다. 샤를은 [[로트링겐]]으로 피신하였다.
 
[[파일:KarelCharles Rudolfthe Simple 02.jpg|thumb|right|140px|샤를의[[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왕관이2세]]의 귀족들에하수인들에게 의해투옥되는 박탈되는샤를 장면3세]]
 
[[922년]] [[7월 2일]] 샤를 르 생쁠은 [[바이킹]] 군대의 지원하에 서프랑크로 되돌아왔다. [[923년]] 샤를은 군사를 일으켜 뫼즈, 아팅기에, 수아송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와 싸웠다싸웠으나, [[6월 15일]] [[수아송 전투 (923년)]]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수아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객을 보내 [[로베르 1세]]를 죽였지만, [[플랑드르]]로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해 [[7월]] [[플랑드르]]성에 미리 숨어있던 [[로베르 1세]]의 처남이자 사위인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곧 [[부르고뉴의 라울]]이 새로 왕이 되었다. 그의 아내 [[에드지푸]]는 아들 [[루이 4세]]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샤를마뉴의]] 차남 [[피피노 카를로만]]의 손자 [[상리스의 피핀 2세]]의 후손으로, [[샤를마뉴]]의 여섯째 아들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인 샤를 3세에게는 같은 가문의 먼 친척이 되었지만<ref>샤를마뉴 대제-경건왕 루트비히 1세-대머리 카를 2세 르 쇼브-말더듬이왕 루이 2세-샤를 3세 생쁠<br />샤를마뉴 대제-피피노 카를로만-베른하르트(서자)-상리스 백작 피핀 2세(서자)-헤르베르트 1세-헤르베르트 2세</ref>, [[818년]]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 (이탈리아)|베른하르트]]가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에 의해 두눈이 뽑히고 장님이 되어 병을 얻어 죽은 일 이후, [[루트비히 1세 (프랑크)|경건왕 루이 드 데보네르]]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2세]]는 자신이 사로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로베르의 사위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줄 66 ⟶ 70:
[[헤르베르트 2세]]는 협상을 하자고 한 뒤 그를 성안에 감금했다. 샤를은 [[노르만 족]]에게 자신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노르만 족은 소수가 그를 지원하였다.
 
[[헤르베르트 2세]]는 포로로 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로베르의 사위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샤를은 곧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페로네]] 성의 감옥에 유폐되었다.<ref>Jean Dunbabin, "West Francia: The Kingdom",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III: c. 900–c. 1024, ed. Timothy Reu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378–79.</ref>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은 그를 합법적인 왕으로 예우하는 한편 포로로 예우하였다. 샤를은 [[927년]] [[솜므]]의 다른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929년]] [[10월]] 페로네(Peronne)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 사후 ===
페로네의 [[생 푸르시 교회]](Saint-Fursy abbey) 묘지에 안장되었다. 샤를은 페로네의[[페로네]]의 감옥에서 굶어죽은 것으로 보나 일설에는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그의 아들 [[루이 4세|루이]]는 [[922년]] 그가 폐위되기 전 모후 [[에드지푸]]와 함께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936년]]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