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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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년]] [[6월]]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라눌프 2세]]를 찾아가 [[외드]]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여 포섭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스폴레토의 귀도 3세|귀도 3세]]는 [[아키텐]] [[공작]]이자 [[아키텐의 군주|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 (아키텐)|라눌프 2세]]에게 샤를 르 생쁠의 보호를 부탁했다. 샤를은 공작이자 자립한 [[아키텐의 군주|아키텐의 왕]] [[라눌프 2세 (아키텐)|라눌프 2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라눌프 2세 (아키텐)|라눌프 2세]]는 샤를에게 [[오를레앙]]의 10개 도시를 주었다.
 
[[893년]] [[1월 28일]] [[랭스]]의 [[대주교]] 풀크와 다른 귀족들의 추대로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뒤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샤를을 [[서프랑크 왕국]]이 진정한 왕으로 내세워 왕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랭스]] [[대주교]] 풀크는 즉위식 때, 샤를의 고조부 [[카롤루스 대제]]의 즉위식을 연상하도록 [[랭스 대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하는 이벤트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헤르베르티언 가문]]과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은 [[외드]]를 지지했다. 한편 친척이기도 했던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는 사자를 보내 샤를 르 생쁠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샤를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샤를 3세의 지지파와 [[외드]] 지지파 간에 내전이 발생했다. [[에페르네]]와 [[랭스]] 지역을 서로 포위하고 주고받았다. 전쟁은 [[894년]] [[3월 31일]]에 잠정 휴전하였다.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는 미성년자가 영토를 제대로 다스릴수 있느냐며 소년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를 묻고는,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895년]] 샤를과 [[외드]]를 [[보름스]]로 소환했지만 샤를은 가기를 거부했다. 화가 난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는 [[외드]]를 [[서프랑크]]의 왕으로 승인하였다. 이어 [[케른텐의 아르눌프|아르눌프]]의 이탈리아 원정 지원 요청 역시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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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Carolingian empire 915.svg|150px|thumb|[[915년]] 무렵 샤를 3세의 영토]]
 
내란이 계속되자 897년 샤를은 왕위를 포기했지만, 두 아들이 일찍 죽어 자식이 없던 [[외드]]는 [[898년]] [[1월]] 동생 [[로베르 1세]] 대신 샤를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므로, 외드가 죽자 단독으로 왕이 되었다. 죽은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는 [[바이킹]]과의 교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인망을 쌓고 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베르는 [[911년]] [[샤르트르]]에서 [[노르만족]]과 싸워 승리했다. 로베르는 왕의 자리는 샤를에게 양보했지만, 여론을 형성하여 권력을 좌지우지했다. 군권 역시 [[로베르 1세]]에게 있었고, 샤를은 일단 이를 승인하였다. 이는 군주권의 상당한 약화를 의미했다. 샤를의 집권 초, 북부에서는 [[바이킹]]과 남부에서는 [[사라센]]이 쳐들어와 약탈을 감행했다. 샤를은 이들을 정리하느라정리하는데 시달림을시간을 당했다할애하였다.
 
[[898년]] [[로트링겐]]의 귀족인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1세]] 등과 내통하여 [[로트링겐]]을 침공하였다. 이어 [[아헨]]을 획득, 서프랑크령으로 병합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비무(Vimeu) 지역에서 [[노르만 족]]과의 싸움에서 이겨 다량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러나 종종 이겼을 뿐 계속된 전투에서 바이킹에게 패하게 된다.
 
[[900년]]대 초부터 [[노르웨이]]에서 온 [[롤로]] 등의 [[바이킹]]이 [[프랑스]] 서북부와 [[노르망디]]를 약탈했다. 샤를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상대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907년]] [[4월 19일]] 또는 [[5월 19일]] [[로트링겐]] 출신 [[인겔하임]] [[백작]]인 이멘티가르(Immedinger)와 부인 라그네힐드(Reginlind)의 딸로, 샬롱 쉬르 마른의 주교이자 [[캄파네]] [[백작]]인 브레브 2세(Beuve II, 일명 보보)의 누이인 [[프레데루나]]와 결혼했다. 프레데루나의 친정 이모가 [[독일의 왕]]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마틸다였다. 이 결혼으로 그의 영지를 노리던 [[하인리히 1세 (독일)|하인리히 1세]]나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레데루나]]는 딸만 6명을 낳고 [[917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 아들을 원했던 단순왕 샤를은 [[919년]]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재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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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arlesIII le simple Jean de Tillet-Recueil des rois de France.jpg|썸네일|왼쪽|110px|단순왕 샤를 3세]]
[[파일:Rollo+Charles.jpg|썸네일|오른쪽|140px|[[롤로]]와 조약을 체결하는 샤를 3세]]
[[911년]]의 [[바이킹]] 그룹이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했다침략하여 [[루앙]]을 차지했다. [[롤로]]가 이끄는 [[바이킹]] 족은 바로 [[파리]]와 [[샤르트르]]를 점령했다. 샤를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지만 대부분 패배했고, [[8월 26일]] [[샤르트르]] 근처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겨우 승리하였다. [[911년]]말 샤를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저 사이네 지역(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노르만족]] [[롤로]]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로마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고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바이킹]]의 프랑스 침공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한 같은해 [[동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조|카롤링거 왕]]인 [[프랑크의 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죽자 [[로트링겐]]의 귀족들은 [[콘라트 1세]] 대신 샤를을 왕으로 받들겠다 하여 [[로렌|로타링기아]]도 복속시켰다.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으로 [[롤로]]와 [[바이킹]] 족에게 노략질을 일삼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노르망디에 정착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샤를은 나중에 노르망디라 불리게 된 지역을 [[바이킹]] 지도자 [[롤로]]와 그의 부하들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롤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샤를의 봉신이 되었다. 조약 체결을 전후해서 [[로베르 1세]]는 막후에서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이 체결되게끔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바이킹 족과 꾸준이 싸워온 [[로베르 가문]] 사람들과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은 조약 체결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미 베르망두아 백작가문의 딸 아델라와 결혼했으나 상처한 [[롤로]]에게 자신의 누이 [[서프랑크의 기셀라]]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샤를이 [[로렌]] 지역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홀대하자 귀족들은 반발했다. [[918년]]부터 그의 지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안 [[독일]]의 [[하인리히 1세]] 등은 [[서프랑크]]의 변경을 침략했으나 오히려 격퇴당했다. [[919년]] [[8월]] [[잉글랜드]]에 결혼 동맹을 제의, 그해 [[8월 17일]]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결혼하였다. 한편 [[로트링겐]]의 귀족들을 총애했고, 그 중에서도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 하가노(Hagano)를 중용하였다.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분개했다. 로트링겐 내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귀족들이 나타났다. 조카사위가 되는 비게리히, 첫 왕비 프레데루나의 친척인 하가노 등 소수만이 그를 지지했고, 하인아우트의 레니에 공작의 사후, 로트링겐에서도 샤를에 대한 지지를 소극적 지지로 돌아선 귀족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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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헤르베르트 2세]]는 협상을 하자고 한 뒤 그를 페로네 성안에 감금했다. 샤를은 [[노르만 족]]에게 자신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노르만 족은 소수가 그를 지원하였다. [[923년]] [[7월 13일]] 샤를의 폐위가 선언되고,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은 [[서프랑크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포로로 잡은 샤를을 이용해, 새로 왕이 된 로베르의 사위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에게서 이권을 얻었다. 샤를은 곧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솜 주|솜]]의 [[페로네]] 성의 감옥에 유폐되었다.<ref>Jean Dunbabin, "West Francia: The Kingdom",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III: c. 900–c. 1024, ed. Timothy Reu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378–79.</ref> [[927년]] 말, [[헤르베르트 2세]]와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이 페론에 도착했을 때 샤를은 죄수복 차림으로 결박되었다.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은 그에게 칼을 가져다가 바치며 그를 일단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였다. [[부르고뉴의 라울|라울]]은 그를 합법적인 왕으로 예우하는 한편, 포로로포로로서 예우하였다. 샤를은 [[927년]] [[솜므]]의 다른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929년]] [[10월]] 페로네(Peronne)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