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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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 후 [[수아송 주]] 검찰청의 서기보시보 시험에 합격한 뒤 [[1787년]] 말 [[랭스]]에 있는 [[랭스 대학]] 로스쿨에 입학했다. 입학 후 [[1787년]] [[4월]]의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수료와 동시에 [[수아송 주]]의 검사서기시보로 발령받고, 바로 검사서기보가 되었다.
 
==== 자유주의 주장과 피신 ====
당시 프랑스는 흉년과 혹독한 한파에 시달렸는데, 그는 공공연히 [[자유주의]],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 자유로운 직업 선택을 말하다가 반쯤 정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1789년]] 22세의 나이로 익명으로 에로틱한 풍자 노래 《바티칸의 오르간》(''Organt au Vatican'')이라는 책을 지하 출판하여 전통과 권위, 가톨릭 교회, 국왕을 비판하고 자유를 주장하다가, 동료의 밀고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서사시 《오르강 Organt》에서 그는 성의 해방, 성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나 생 쥐스트 자신은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금욕주의적으로 생활하였다.
 
서사시 《오르강 Organt》에서 정치적 암시로 가득 찬 풍자적인 내용과 음란성을 거침없이 표현한 생 쥐스트의 이 저서는 곧 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는 [[볼테르]]의 《처녀 (La Pucelle)》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아직 그의 문장력은 정제되어 있지 않았다. 《오르강》에서 그는 격렬한 열정과 원한을 토로하였지만 친구들조차 이 작품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그의 적들은 조롱했고 [[1789년]] [[6월]] 당국은 〈오르강〉을 압수했다. 익명으로 출간한 그는 주변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조심하느라 사직서를 내고 파리에 있는 친구 집에 몸을 숨겼다.
 
=== 혁명 활동 ===
==== 혁명 활동 초반 ====
혁명의 혼란이 발생했을 때 그는 혁명의 초기부터 참여하려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790년]]에는 [[7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위병대]]의 지역 대원으로 참여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한 끝에, 같은 달 23세의 나이에 국민위병대국민위병대의 대장이[[블레랑쿠르]]지역대의 제2대대장이 되었고, 그러나 우선 나이가 젊다는 약점과 현지에 변변한 인맥, 연줄이 없이 뿌리내리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점, 현지의 적대적인 파벌들을 극복해야 했다. 그해 [[7월 14일]] 지역 민병대 지휘관의 한 사람 자격으로 [[파리]]로 가 연맹 축제에 참가한다. 그러나 파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나중에는 실망스러웠다고 평하였다. [[1791년]]에는 ‘혁명과 프랑스 헌법의 정신’을 발행하여 혁명 중 최연소 이론가가 된다.
 
생쥐스트는 어설픈 자비 보다는 확실한 심판을 주장하였다. 그는 '혁명은 이제 자비롭고 어설픈 정의감이나, 어떤 애국적인 활동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 건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으며, 어설픈 타협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생쥐스트에 의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쉽게 바뀌거나 변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정의를 내렸다. [[1791년]] 그는〈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이란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대담한 표현과 함께 생략법을 구사했다. 〈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에서 그는 입법의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첫 단계의 헌법으로는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지만 아직도 기득권의 벽이 탄탄하여 프랑스 국민은 자유롭지 못하며, 지금 현재는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지만 국민주권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법률은 여론에는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되며 윤리에는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해의 [[국민공회]] 의원 선거에 그는 2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출마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실망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며 왕당파, 사제 계급 등을 공격하는 논설과 칼럼을 발표했다.
 
==== 엽관 활동 ====
그는 혁명에서 원하는 역할을 맡기 위해서는 지위의 역할도 어느정도 필요하다 여겼다. 그는 시청이나 주 정부의 행정관이 되거나 법관이 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국민의회]]의 지역의회 의원에 선출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당시 생쥐스트는 아직 지역의회 의원에 입후보할 수 있는 나이인 25세가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시청과 주 정부, 법원의 관료가 되기 어렵다는 점과, [[오르강]] 등의 서적의 저자가 자신임이 알려진 것에 낙담했다. 하지만 [[1791년]] [[블레랑쿠르]] 시청의 시 법률고문이 되어 시의 복지 정책과 자유무역, 관세 감소 등을 옹호하였다.
 
그러는 한편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여인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공연히 그녀를 만났다. 그는 [[블레랑쿠르 시]]의 시청 법률고문 직은 유지했지만, 되도록 블레랑쿠르 시를 벗어나 그 주변 지역의 각종 사교클럽과 모임, [[가톨릭]] 계통의 종교 시설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다. 몇번의 감기와 과로로 빠진 것 외에는 그는 항상 그러한 모임에 참여했다. 한편으로 야간을 이용해서 단기간의 노동에 종사하여 약간의 여유 수입원을 벌어들였다. 그는 동시에 반혁명적 소책자를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몇번의 퍼포먼스로 [[국민의회]]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블레랑쿠르]] 지구 주민들은 그를 차기 [[국민의회]]의 의원으로 뽑을 만한 유능하고 활동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그는 의원 입후보 자격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중앙의 정치인들에게로도 손을 뻗쳤다. 그는 혁명의 강화를 외치고 인민의 적을 처단해야 함을 강조했지만, 한편으로 정치가들의 자부심을 부추기며 아부를 늘어놓은 편지를 정치가들에게 써보내기도 했다.
생쥐스트는 어설픈 자비 보다는 확실한 심판을 주장하였다. 그는 '혁명은 이제 자비롭고 애국적인 활동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 건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으며, 어설픈 타협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1791년]] 그는〈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이란 책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대담한 표현과 함께 생략법을 구사했다. 〈프랑스 혁명 정신과 헌법 정신 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에서 그는 입법의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첫 단계의 헌법으로는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지만 아직도 기득권의 벽이 탄탄하여 프랑스 국민은 자유롭지 못하며, 지금 현재는 국민이 주권자가 아니지만 국민주권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법률은 여론에는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되며 윤리에는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해의 [[국민공회]] 의원 선거에 그는 25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출마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실망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며 왕당파, 사제 계급 등을 공격하는 논설과 칼럼을 발표했다.
 
==== 정치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