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루시마 미치후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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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로쿠 10년([[1567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외할아버지인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 의해 배다른 형 셋을 제치고 일곱 살의 나이로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대대로 고노 가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구루시마 가문은 미치후사의 대인 겐키(元亀) 원년([[1570년]]) 고노 미치노부(河野通宣)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 바쳤던 공금을 빼돌리는 등 차츰 고노 가문에 대한 독립적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고노 집안의 동맹이던 모리 씨(毛利氏) 집안이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을 공격하는데 원군으로써 참가해 오토모 가문의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당시 해전에서의 작전을 놓고 모리 수군을 거느리고 있던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武吉)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덴쇼]](天正) 10년([[1582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신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권유로 오다 가문을 지원하고자 모리 가문이나 고노 집안을 공격해 그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던 지역들은 순식간에 히데요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가시마 성(鹿島城)에서 항전하던 형 [[도쿠이 미치유키]](得居通幸)를 히데요시 편으로 삼고, 히데요시와 모리 가문과의 화친이 성립된 뒤 옛 영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미시마 무라카미 씨 집안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자신의 편으로 가담한 미치후사를 중용했고, 이때 성을 무라카미에서 구루시마로 바꾸게 되었다.
 
덴쇼 13년([[1585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國) 정벌군을 맡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에서 선봉으로 이요로 나아가 옛 주군이었던 고노 가문을 쳤다. 이 전공으로 이요 국 가제하야 군(風早郡) 1만 4000석의 다이묘가 된다. 덴쇼 15년([[1587년]])의 [[규슈 정벌]],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공성전에도 참가했다. 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는 연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미치후사가 히데요시와 같은 도요토미(豊臣) 성을 사성받은 적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임진왜란]]([[1592년]])에 참전하였다. 처음에는 시코쿠 세력을 이끌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5번대에 배속되어 [[충청도]](忠淸道) 방면에서 육전에 종사했으나, [[이순신]](李舜臣) 등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가 흔들리자 다시 수군을 지휘해 조선 수군과 맞서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나자 다시 참전, 남원성 공략 당시 6백 명을 거느리고 육군으로써 싸우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함께 수군으로써 [[전라도]](全羅道) 방면의 조선 수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진격했지만, 9월 16일에 [[진도]]의 [[울돌목]]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작전 중 사망|전사]]하였다([[명량대첩]]). 향년 37세(참고로 미치후사의 형 미치유키는 [[1592년]] [[당포 해전]] 때 전사).
 
== 명량대첩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