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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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후사가 없이 사망했으므로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서프랑크]]의 [[샤를 3세 (서프랑크)|단순왕 샤를 3세 생쁠]]과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젊은 콘라트]]를 후보자로 세웠다. 결국 투표 결과, 그의 근친이자 프랑켄의 공작인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선출되었다. 루트비히의 시신은 부왕 [[아르눌프 폰 케른텐|아르눌프]]의 석관이 안치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 에메람 수도원(St. Emmeram)에 안치되었다.
 
그가 자식 없이 죽자 동프랑크는 귀족들의 선출로 국왕을 선출하였다. 동프랑크에서는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와 [[작센]],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공작이 국왕을 선출하였다. 이는 2백년간 유지되다가 1198년부터는 마인츠, 쾰른의 대주교 및 [[작센]], [[브란덴부르크]]의 공작과 왕이 독일 군주를 선발하는 제도로 명문화되어 정착된다. 이들 국왕 선거인들 중 왕과 공작 등은 선제후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