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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로 [[내물 마립간]]의 7세손이다.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으며, 풍채가 청순하고 뜻이 방정하여 무리로부터 화랑에 추대되었다. 낭도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562년]]에 진흥왕의 명으로 [[이사부]]가 대가야 정벌에 나섰는데, 사다함은 15~6세의 나이로 왕에게 출진을 간청하여 귀당(貴幢)의 비장(裨將)으로 종군하였다. 사다함은 자청하여 선봉이 되었으며, 성문인 전단량(旃檀梁)을 기습하여 적을 당황시켰고 그 결과 크게 승리하였다. 이 공으로 가야인 300명과 전답을 받았으나 노비는 모두 풀어주고 전답 역시 알천(閼川)의 불모지를 받았다.
한편 학계에서 [[위서 (문헌학)|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은 [[54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사신(私臣)인 [[무관랑]]과 사통의 관계가 들키자 [[무관랑]]은 주변의 비난을 받게된다. 하지만 사다함은 [[무관랑]]을 불러 "나의 어머니의 죄일뿐 자네의 죄는 아니다'라면서 위로를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무관랑]]은 월성을 뛰어 넘던중 구지(溝池, 해자)에 떨어져 다리를 다친후 며칠만 후 죽게된다. 이를 원통하게 생각한 사다함은 오열을 하다가 병에 걸려 죽게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죽기 직전 [[풍월주]]의 자리를 [[미실]]의 남편인 [[
한편 사다함은 [[미실]]과 정인관계였으나 [[미실]]이 세종과 혼인을 하게되자 청조가(靑鳥歌)를 부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미실의 꿈에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미실은 이 이야기를 남편인 세종에게 말한 후 세종과 관계를 가졌다. 이후 미실은 [[하종]]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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