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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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2011-10-28
| 확인날짜 = 2012-07-21
}}</ref>. 한편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ref>《조선왕조실록》영조 90권, 33년(1757 정축 / 청 건륭(乾隆) 22년) 11월 11일(기해) 4번째기사</ref> 한편 빙애를 구타할 때 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恩全君)도 칼로 쳤다. 그리고 그는 칼 맞은 은전군을 문밖 연못에 던졌다.<ref name="dramas"/> 평소 사도세자를 경계하고 미워했던 정순왕후의 측근들 중에 세자의 주변에서 세자의 비행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 영조는 자신의 서손자 [[은전군]]의 자(字)를 연재(憐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ref name="dramas"/> [[경빈 박씨]]는 죽었고, 후일 [[은전군]]은 사도세자의 자녀들 중에서도 유독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었을 것이라 여겨져 한때 [[노론]] [[벽파]]로부터 택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돌이 갓 지난 은전군이 칼 맞았고, 그걸 연못에다 던졌다. 그런데 구해내서 살렸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 한 살 된 애가 칼 맞아 연못에 던져졌는데 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세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다가, 1년 반 뒤에 세자가 평양 간 사건으로 사형을 당했다. 대체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영조가 직무 유기를 한 것인가? 한 해에 100명씩이나 죽이고, 경빈도 죽이고, 애까지 죽이려 했는데, 영조가 가만히 두었다고? 그걸 믿어야 하는가?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