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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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년(천성 8년) 서른 살때 진사에 급제하여 고관으로 출세의 길이 열려있었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가꾸진 독립 사상은 그의 성품 중의 하나로 계속해서 남게 되었다. 이후 관각 비교 연구 등을 역임하지만, 1036년 (경우 3년) 개혁파 [[범중엄]]을 월권을 하면서까지 변호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당시 재상이었던 [[여이간]]에 의해 이능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034년에는 아내와 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었으나 1043년 [[북송 인종|인종]]은 언로(言路)를 확장하기 위해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수 등을 지간원(知諫院)으로 삼고 여정(余靖)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하자 같은 해 4월에 구양수는 경사로 돌아온다.
 
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에 복귀 간관에 임명된다. 범중엄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의 신임를신임을 잃게 되었고, 1045년 (경력 5년)에는 비방을 받아 [[안후이 성]]의 지사로 또 한번 좌천되었다.
 
몇 년 뒤 다시 한번 중앙에 복귀하여 한림학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1054년 몇 년 만에 구양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며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했다. 1057년 (가후 2년) 권 지례 부공거에 오르고, 1058년에는 [[포증]]에 이어 개봉 부윤의 임무에 종사한다. 또한 과거 시험을 감독하여 [[소식]]을 발굴했다. 당시 구양수의 정적들은 그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각종 모함과 구설수를 만들었지만, 구양수는 지속적으로 경사에 머무르며 《[[신당서|당서]]》 편찬에 참여하게 되고 한림학사 겸 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