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순 (영화 녹음기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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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이경순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창성]]에서 태어났다. 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큰형이 운영하는 춘일악기점이라는 자전거포 겸 악기점에서 [[축음기]]와 유성기판, 라디오 보급과 수리 등의 일을 도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리와 인연을 맺게 된 이경순은 [[1935년]] 서울의 [[JVC|빅터축음기주식회사]] 레코드부에서 각종 음향시설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ref>[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747/p/1 씨네21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한국영화 80% 녹음한 한양스튜디오 창립자인 초대 녹음기사 - 이경순]</ref> [[1937년]]에는 [[JVC|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본격적으로 현장연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경성전기학교|경성전기학교(京城電氣學校)]] 야간부에 들어가 [[1941년]]에 졸업했다. 이 무렵 스카라극장의 전신인 [[약초영화극장|서울 약초극장(若草劇場)]]에서 RCA토키장치의 출장서비스를 담당하게 되었고, [[JVC|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알게 된 최칠복을 따라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의조선영화주식회사의 영화녹음 현장을 견학하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후 [[한국전력공사|경성전기회사]](京城電氣會社) 통신계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최칠복의 소개로 [[주한 미군|주한미군]] 502부대 녹음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이필우 (영화 감독)|이필우]], [[이명우 (영화 감독)|이명우]], [[김학성 (1913년)|김학성]] 등과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주한미국공보원과 함께 진해로 내려가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1951년]] 당시 [[국방부]]가 제작하던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의 녹음을 위한 시설 대여 요청을 미공보원이 거절한 데 충격을 받아서 퇴직하게 된다. 이때 조백봉, 김형근, 김봉수 등 함께 나온 동료들과 함께 목욕탕을 개조해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했다. [[1962년]]에 설립한 한양녹음실을 [[1969년]] [[한양스튜디오]]로 개칭한 후 1990년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ref>[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gGubun=01&tabmov=T&person_id=00001579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이경순]</ref>
 
[[2006년]] 4월 18일 이경순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마둔리에 위치한 자신의 '박물관'에 소장, 전시돼오던 영화기자재 500여 점을 [[안성시|안성문화원]]에 기증하는 약정식을 가졌다.<ref>[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04/200604180651.html 영화음향의 산증인 이경순씨, 안성시에 장비·자료 1000점 기증]</ref><ref>[http://www.assm.co.kr/sub_read.html?uid=1218 영화인 이경순 옹, 기자재·소품 500여 점 기증]</ref><ref>[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109 영화 유산 500여점 기증]</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