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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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eichsschwert ludwig der deutsche.jpg|썸네일|왼쪽|120px|루트비히 2세]]
{{참고|로타링기아|메르센 조약}}
[[869년]] 초 셋째 아들 [[카를 3세]]가 봉토 배정에 불만을 품고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로타르 2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철군한다. [[869년]] [[로타르 1세]]의 아들 [[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로타르 2세의 서자인 어린 [[위그 (로트링겐의 왕자)|위그]]를 제치고 [[로타르 2세]]의 영토를 공동 분할하기로 약속하였다. [[869년]] [[로타링기아]]에 도착한 대머리 카를은 자신이 [[로타링기아]] 전체를 정복했음을 선언하고, 자신을 스스로 황제이며 존엄한 자(Imperator Augustus)라고 선언했다. 이복 형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즉시 반발했다.
 
그러나 카를이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로타링기아를 합병하자, [[870년]] 독일인 루트비히는 [[동프랑크]]와 [[모라비아]]의 군대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를 침공했다. 결국 [[교황청]]이 나서서 중재를 요구했고, 그해 [[메르센]]에서 대머리 카를을 만나 [[메르센 조약]]에 따라 카를과 함께 [[로타링기아]]를 분할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루트비히는 옛 프랑크 왕국의 수도인 [[아헨]] 지역, [[라인 강]] 서쪽의 영역과 [[쾰른]], [[프리슬란트]] 등을 차지했다.
 
[[865년]]과 [[872년]] 3명의 아들인 [[카를로만]], [[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루트비히 청년왕]], 비만왕 [[카를 3세]]를 맏이에게는 바이에른과 [[케른텐]], 둘째 소 루트비히에게는 [[작센]], 셋째 카를에게는 각각 [[알레만니아]] 영토를 나누어 주었으나, 이 분할에 불만을 품은 아들들은 [[861년]]부터 [[873년]]에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