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1세 (카스티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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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는 1451년 4월 22일 [[카스티야 왕국]]의 카스티야 마드리갈데라스아틀라스토레스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이사벨]]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계승되어 온 이름이며, 이사벨 1세는 7대째였다. 이사벨 1세는 부계로는 [[카롤링거 왕조]]의 먼 외후손인데 [[이탈리아]]의 군주 [[베렝가리오 1세]]의 20대 외손녀이자, 그의 외손자 [[베렝가리오 2세]]의 직계 18대 손이 된다. [[베렝가리오 2세]]의 아들 [[아달베르토 2세]]의 미망인 게르베르가가 [[부르고뉴의 오토 앙리]]와 재혼하여 본남편의 아들 [[오토 윌리엄]]에게 부르고뉴 동쪽 땅 일부를 분할하여 [[부르고뉴]] [[백작]]에 봉했다. 오토 윌리엄의 아들들 중 [[부르고뉴의 레이몽]]은 [[레온]]과 [[카스티야]]의 통치자였던 지메네즈 가문의 우라카 여왕와 결혼하여 얻은 [[알폰소 7세 (카스티야)|알폰소 7세]]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이사벨의 15대조 [[알폰소 7세 (카스티야)|알폰소 7세]]부터 아들로 전해지면서 이사벨 1세의 아버지 [[카스티야의 후안 2세]]까지 14대를 아들로 이어졌다.
 
이사벨의 고조 할아버지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는 원래 [[트라스타마라]] [[공작]]으로, [[카스티야의 알폰소 9세]]의 첩들 중 한 명이 낳은 14번째 서자였다. 그러나 이복 동생 [[카스티야의 페트로]]를 쿠데타로 축출하고 레온, 카스티야의 왕이 되었다. 고조부 엔리케 2세가 후궁의 아들이자 [[트라스타마라]] [[공작]]을 지냈기에 이사벨의 집안은 부르고뉴 집안이라 하지 않고 고조부의 작위에서 이름을 따서 [[트라스타마라 왕가]]라 부른다.
 
이사벨 공주가 태어나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부정부패의 온상인 루나 재상의 손에 썩어가고 있었고, 국왕은 재상의 그늘 아래에서 병들어가고 있었다. 이사벨 왕후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왕 후안 2세 대신에 사별한 전처의 아들인 엔리케 왕자와 함께 강인한 정치력을 발휘해 이사벨 공주가 두 살 되던 해에 정변을 일으켜 루나 재상을 사형에 처했다. 그 사이에 이사벨 왕후는 공주의 동생 알폰소 왕자를 국왕의 품에 안겨 주었지만, 아이가 돌도 되기 전에 국왕은 숨을 거두었다.<ref name="이사벨 1세 338">이사벨 공주~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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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밖에서 살다 ===
결국 이사벨의 이복오빠가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엔리케 4세]]로 즉위했다. 엔리케 4세에 의해 이사벨은 어머니와 남동생 알폰소와 함께 궁정에서 추방되어 아레발로에 도착하였으나 이성을 잃은 이사벨 태후는 [[정신장애]]인이 되어버렸다. 이사벨은 어린 남동생과 정신장애인인 어머니를 돌보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궁중 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이사벨은 강인한 생활력을 평민들의 삶에서 보고 배웠다. 태후가 [[정신장애]]인이 되자, 정치적인 불안감이 사라진 엔리케는 이사벨과 알폰소를 돌보기 시작했다. 엔리케는 [[살라망카대학교]]의 유명 교수를 아레발로로 보내 이사벨을 공부시켰다.<ref name=autogenerated1>이성을 잃은~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9</ref>
 
그 후, 엔리케 4세에게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가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어 왕위를 계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귀족들은 이사벨의 이복 오빠인 엔리케가 정신질환이 있는 점과 두 번의 결혼에도 계속 불임이었던 점을 이유로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의 계승권을 부인했다. 일부 가신들은 현 국왕의 이복 남매인 이사벨과 [[알폰소]]를 다음 국왕 자리에 앉히려고 마음먹었다.
 
[[파일:Isabel_firma.jpg|left|250px|thumb|이사벨 1세의 필체 서명]]
 
=== 결혼 ===
[[1464년]], 알폰소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나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이었기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일어났다. 이 상태는 [[1467년]]에 알폰소가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맞는다. 알폰소의 지지자들은 이사벨을 다음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이사벨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 라는 식으로, 이복오빠의 친딸인지 불분명한 후아나보다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기에 더 합당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보이는 식으로 거부를 했다. 그 덕분에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눈에 들게 되어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 따라 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