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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의 고드프루아'''({{llang|fr|Godefroy de Bouillon}}, 1060년경~[[1100년]] [[7월 18일]])은 십자군 전쟁 중 [[1차 십자군]]의 지도 중 한 명으로 예루살렘의 초대 [[성묘]] 수호자였으며, [[하 로렌 공]](公)({{llang|en|Lower Lorraine}}, {{llang|de||Herzog von Lothringen}}, 재위: [[1089년]]~[[1100년]])이었다. 시온수도회의 설립자라고 하며<ref name="댄 브라운">{{서적 인용|저자=댄 브라운|제목=다빈치 코드 2|편집자=양선아 옮김|출판사=베텔스만 코리아(주)|발행일자날짜=2004년|쪽=33|꺽쇠표=예|id=ISBN 978-89-5759-052-2}}</ref> [[1099년]] 7월 이슬람교도에게서 예루살렘을 되찾은 뒤,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의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
 
== 생애 ==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 4세]]의 후손<ref name="댄 브라운"/><ref name="베이전트">{{서적 인용|저자=마이클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제목=성혈과성배|편집자=이정임, 정미나 역|출판사=자음과모음|발행일자날짜=2005년|쪽=364~365|꺽쇠표=예|id=ISBN 978-89-544-0342-9}}</ref> 고드프루아는 블로뉴 백(伯) 외스타슈 2세와 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2세의 딸 이다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으나, 백부 하 로트리겐 공(公) 고드프루아 4세(한스버그)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1076년]] 고드프루아 4세가 죽었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로렌 공작령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기 위해 처음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1082년]]에 들어서 고드프루아에게 프랑스 아르덴 지역에 있는 부용을 그에게 주고, 그를 승인했다. 그는 황제를 위해 전쟁을 벌이며 충성한 댓가로 [[1089년]] 로렌 공작령을 돌려받았다.
[[1093년]] 고드프루아는 군대를 동원해 스테네이에서 대대적인 포위 공격을 하였다. 그 공격의 목적은 지역 귀족의 손아귀에 있던 '성 다고베르트 교회'를 되찾아서 고르즈 수도원에 되돌려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ref>앞의 책, 345 페이지</ref>
 
그는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되고 시온기사단을 창설하였다.<ref name="베이전트 371">앞의 책, 371 페이지</ref> 그의 가계는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졌다가 소수도원 문서의 발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ref>앞의 책, 361~363 페이지</ref>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을 아스칼론에서 격파했으나, 레몽과는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아스칼론]]을 탈취하지는 않았다. 성당기사단에게 [[솔로몬 왕]]의 신전 아래에 있는 상그리엘 문서들을 회수해 오라고 지시하였다.<ref name="댄 브라운"/> 그는 상그리엘 문서를 통해 자신이 메로빙거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입증하려 하였다.<ref name="댄 브라운"/>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기를 원했기에 대립했다. 결국 고드프루아가 이집트를 빼앗아 왕국을 만들고 난 뒤에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자고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던 중 1100년 7월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의문점이 있다. 보에몽과 다임베르트가 짜고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하는 가운데, [[의문사]]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확실치 않고, 기록마다 다른데, 단순 병사, 암살자의 화살에 맞고 피살당했다, 독살을 당했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생 [[에데사 백국|에데사 백작]]이었던 보두앵이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십자군 중요 인물}}
 
{{Authority control}}
 
{{DEFAULTSORT:고드프루아 드 부용}}
[[분류:제1차 십자군]]
[[분류:십자군 관련자]]
 
{{Authority 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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