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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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여파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에 확산시켜 개혁·개방화 체제로 유도하는 것을 그 정책목표로 삼았다.<ref name="한416"/> 김영삼의 대북정책은 남·북간의 '공조·공영'에 있다고 천명하고 있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역대 전임 정권이 취해왔던 '대북 우위를 견지하는 흡수통일'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평가된다.<ref name="한416"/> {{언제|날짜=|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와 함께 화해분위기가 지속되어}} [[1993년]] 취임 초 김영삼은 북조선의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하여 호응을 이끌어내,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하고, 남북고위급 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를 준비하려 하였다. 그러나 [[1994년]] [[7월]]에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1993년]] 취임 초부터 북측과 연락, {{언제|날짜=|김영삼 정부는 [[남북한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9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여 김영삼 정부는 갑자기 1차 북핵위기를 맞았고, 이후 대북정책이 '냉, 온탕'을 왔다갔다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 name="전직 대통령">{{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432696 |제목=전직 대통령 북핵실험 진단 `3인3색'> |출판사= 연합뉴스 |작성일자날짜 = 2006-10-10}}</ref> 1994년 6월에 일어난 1차 북핵 위기는 미국이 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계획하는 등 파국으로 치달랐다. 김영삼 정부도 공습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ref name="전직 대통령"/> 이를 저지하였다. 위기는 대북 특사 [[지미 카터]]와 김일성이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 살상 무기#제1차 북핵 위기|제1차 북핵 위기]])
 
지미 카터의 방북시, 김일성은 지미 카터에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갑작스러운 북미관계 개선으로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315_6142.html 정부,국면 전환 주시] 1994.6.17 mbc뉴스데스크</ref> 6월 18일, 북측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자 무조건 수락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1388_6142.html 김영삼대통령,남북정상회담 제의 사실 전달받아 즉각 수락] 1994.6.18 mbc뉴스데스크</ref> 불과 하루만에 북측의 놀라운 태도변화로 정부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국제적인 해빙무드를 거스를 수 없어 북측의 정상회담제의를 무조건 수락했다. 김영삼은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7월 2일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의 절차도 완전히 마무리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07,1,list1,2.html] 1994.7.2 mbc뉴스데스크</ref> 이제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대한민국]]의 통일은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그러나 7월 9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07,1,list1,9.html] 1994.7.9 mbc뉴스데스크</ref>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측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다.<ref name="오마이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14823 딱 네 글자에 3조원 쓴 YS... MB는?] - 오마이뉴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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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관계 ===
{{참고|한미 관계#김영삼 정부}}
[[1993년]] 7월에 한미 관계가 처음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북측과 미국이 [[대한민국]]을 배제한 채 직접 핵 협상을 하면서 김영삼과 클린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과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충돌한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로“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북측에 보냈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영삼은 상당히 화를 냈다. [[1994년]] 미국의 영변 폭격 계획과 더불어 [[제네바 합의]] 체결을 둘러싸고 한미간 갈등이 나타났다.<ref>{{뉴스 인용 |url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0701070823316002 |제목=MB-오바마 ‘궁합’은? |출판사= [[문화일보]] | 작성일자날짜 = 2008-11-7 }}</ref> 1996년 10월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는데(→[[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당시 미국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던 [[김채곤]](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돼 미 연방교도소에 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과정에서 클린턴과 김영삼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이 때문에 김영삼은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0701070823316002 YS-클린턴][https://archive.is/20120707061406/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ref>
 
=== 한일 관계 ===
[[1995년]] 10월, [[일본]]의 [[일본 총무청|총무청]] 장관인 [[에토 다카미]]는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도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라는 발언을했고 이후 [[1996년]]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도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발언하는 등 일본의 정계에서 식민지 지배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정당화하는 발언들이 끊임없이 나오자, 이에 [[김영삼]]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8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8&officeId=00020&pageNo=7&printNo=23029&publishType=00010 |제목=日 불쾌감 표시 |출판사= [[동아일보]] | 작성일자날짜 = 1995-11-18 |쪽=7}}</ref>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한·일 해군력의 현실태를 보고 받고는 이지스함 2척 보유 정책을 추진한다.(1995년 5월 2척 계획추진에서 시작, 1998년 1월 31일 국가부도로 한국형 구축함 사업 예산 전액삭감, 이후 김대중 정부때 사업 부활하면서 3척 계획)
이후에도 한일 관계는 순탄치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와중에 97년 겨울, [[IMF사태]]가 터지자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30677 냉탕·온탕 오가는 한일관계 'MB式' 해법은 ]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634841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ref>
 
=== 한-유럽 관계 ===
1993년 9월 14일 ~ 16일까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한-불 정상 회담을 갖고,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 측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단, 그 구체적인 시기와 절차는 실무협의하기로 했다. 그 결정의 상징으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 1권을 9월 15일 한국에 반환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고속철도 핵심기술 이전 및 차세대 고속전철 개발 협조를 논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50032910600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9-15&officeId=00032&pageNo=6&printNo=14864&publishType=00010|제목=한국古書2점 오늘 반환 |출판사= [[경향신문]] | 작성일자날짜 = 1993-9-15 |쪽=1}}</ref><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1700099101015&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3-09-17&officeId=00009&pageNo=1&printNo=8535&publishType=00010 |제목=미테랑 離韓 |출판사= [[매일경제신문]] | 작성일자날짜 = 1993-9-17 |쪽=1}}</ref> 1993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한 [[슬로바키아]], [[리히텐슈타인]]과 수교하였다. 1995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992년 독립)와 수교하였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