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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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ref name="chung161"/>'라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ref name="chung161"/>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를 명령했다.<ref name="chung161"/>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ref name="chung161"/>
 
=== 생애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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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바위]] : 서울의 성곽(城郭)을 쌓을 때 정도전(鄭道傳)과 무학(無學)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지 밖으로 둘지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왔다가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게 되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4,00040000,11 선바위], 문화재청</ref>
 
[[조선 영조]] 재위 24년인 서기 1748년 [[함경도]](咸鏡道) 출신의 승지(承旨)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이성계](李成桂)]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장지(葬地)에 관한 일화(逸話)가 나온다. [[공민왕]] 재위 9년인 서기 1360년에 부친이 죽자 [[이성계]]는 [[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師弟)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을 두고 대화한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仔細)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緊要)하듯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교정(矯正)해 주었다. 가동(家僮)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청(懇請)해 ‘왕이 날’ 장지(葬地)를 얻었다는 전설(傳說)이다.<ref name="나옹제자무학">{{뉴스 인용|url=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8521|제목=21세 ‘격구 천재’ 이성계, 고려 조정에 얼굴을 알리다|이름=이덕일 칼럼|작성일자날짜=2010-08-22|출판사=중앙SUNDAY|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1-15}}</ref>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편찬(編纂)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전설이 더 자세(仔細)히 기록됐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哀乞)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兆朕)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願)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노승이 [[혜근|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無學)이라는 전설이다. 부친 장지(葬地)를 다룬 이런 일화는 [[이성계]]가 만 25세 때부터 반역(叛逆)을 꿈꾸었다는 전설(傳說)이다.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와 무학(無學)이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조선 태조|태조]]의 꿈을 풀어 주면서 왕이 될 운명이라고 한 이야기가 두 사람이 급속도(急速度)로 가까워진 듯하다. [[조선 태조|태조]]가 고려 말에 [[홍건적]]과 왜구(倭寇)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날리던 중 어느 날 밤 닭이 우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도 신기해서 친구인 무학을 찾아가 꿈을 이야기했더니 무학이 큰 절을 하면서 이제 왕이 되겠습니다라고 한 이유는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데 꼬는 한자(漢子)로 고(高)이고 까는 한자로 귀(貴)이고 요는 한자로 위(位)인데 이 세 마디 말을 합치면 고귀위(高貴位)인데 이는 높고 귀한 자리로 바로 왕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성계(李成桂)는 이 꿈을 이용해 자신의 왕업을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결국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조선]]을 세웠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이 무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무학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무학은 단순히 왕과 가까운 권승(權僧)이 아니라서인지 [[고려 충숙왕]][1328년]때 [[인도]]에서 [[원]](元)을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 규모 사찰로 중창하였던 [[회암사]](檜巖寺)는 지공(指空)과 [[혜근|나옹]]과 무학까지 려말선초(麗末鮮初) 최고 [[선승]]으로 다루는데 이런 무학은 [[선승]]으로서 [[풍수지리]]에도 해박(該博)해 [[서울]] 도성 위치를 설정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ref name="나옹제자무학"/><ref>{{뉴스 인용|url=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29351|제목=천보산과 회암사(檜巖寺)의 국사 무학대사|이름=김산 홍재인문학연구소장|작성일자날짜=2012-12-03|출판사=경기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3-01-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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