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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昌(건창) 南豊(남풍)[현, 江西省(강소성) 南豊縣(남풍현)] 출신. 6세 때에 『六論(육론)』을 썼다. [[1057년]]에 [[구양수]]가 주최한 [[과거]]에 형제지간인 [[소식]]·[[소철]]과 함께 급제한 후 문풍(文風)을 일신하게 해서 명성을 얻었다. 太平州(태평주) 司法参軍(사법참군)을 거쳐 중앙에 들어가 編校史館書籍(편교사관서적;중앙도서관)ㆍ館閣校勘(관각교감)ㆍ集賢校理(집현교리)ㆍ英宗實錄檢討官(영종실록검토관)이 됐다. 지방에 다시 나와서 越州(월주)ㆍ通州(통주)의 通判(통판), 齊州(제주)ㆍ襄州(양주)ㆍ洪州(홍주)ㆍ福州(복주)ㆍ明州(명주)ㆍ亳州(박주) 등의 知州(지주)를 역임했고 민중의 안녕 유지와 행복 증진을 꾀하는 행정에 마음을 잘 써서 치적을 올렸다. 제주(齊州)의 지주(知州)로서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 할 때, 민중이 그 훌륭한 공적(功績)을 애석히 여겨 교량을 파괴해 폐문한 채 증공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해서 밤을 틈 타 간신히 떠났다. 이어 判三班院事(판삼반원사)로 재직 시, 국가의 재정이 근년에 들어 팽창하는 사태를 우려해 상주(上奏)하여 경비(經費)를 반드시 삭감(削減)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송 인종|인종]]은 그 의견을 기꺼이 듣고서 “五朝(오조)의 치적은 증공의 판단이 옳다”라고 하면서 史館修撰(사관수찬)에 제수했다. [[1082년]]에 中書舎人(중서사인)을 거쳐 익년 4월에 죽었다.
 
먼 혈통의 인척 관계에 있는 [[왕안석]]과는 [[1041년]]경에 직접 알게 된 이후 평생에 걸쳐 친하게 사귀었다. 동생인 曾布(증포)는 新法黨(신법당)의 유력한 일원이었지만, 증공 자신은 新法(신법)을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 왕안석에게 간절한 편지를 직접 송부해 그 반성을 재촉하기도 한다. 수수한 인품이 이유의 하나가 되어 官界(관계)에는 그다지 출세하지 못했고 그 산문도 화려는 부족하지만, 끈기 있고 결실한 의론(議論)의 전개가 특징으로, [[청나라|청]] 대 桐城派(동성파)의 고문가(古文家)인 姚鼐(요내)는 “증공(曾公)은 능히 그 단점으로 하는 곳을 피해 어기지 않는다”라고 평한다. 南豐七曾(남풍칠증)의 일원이자 [[당송팔대가]]의 일원,일원으로서 서발(序跋)ㆍ잡기(雑記) 류에 우수한 작품이 많고 고대 서적 정리ㆍ교감에 종사하던 시기의 작품인 『戰國策目錄序(전국책목록서)』가 유명하다. 시문집에 『元豊類藁(원풍류고)』 50권ㆍ『續元豊類藁(속원풍류고)』 40권ㆍ『隆平集(융평집)』 30권이 있다.
 
고전적(古典籍)의 교정(校訂)과 보전에도 노력하고 현존하는 『[[전국책]]』 33편본은 증공이 재교정을 시행한 텍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