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위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hirobot (토론 | 기여)
잔글 白:사:Ysjbserver요청으로 {{주석}}을 {{각주}}로 바꿈 total:18220, replaced: {{주석 → {{각주 using AWB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 성씨 = 강화 위씨 (江華 韋氏)
| 관향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시조 = [[위수여]] (葦壽餘)
| 중시조 = 위조 (韋組)
| 집성촌 =
| 인물 = [[위근영]], [[위득유]], [[위원]], [[위수징]], [[위창수]]
| 년도 = 2000
| 인구 = 1,805명
19번째 줄:
강화 위씨(江華 韋氏)의 시조 '''[[위수여]]'''(葦壽餘, ~ [[1012년]])는 [[960년]]([[고려 광종]] 11년) 중원(中原)에서 [[고려]]로 동래하여 사선관(司膳官)이 되었고, [[고려 목종]](穆宗)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현종(顯宗) 초에는 치사(致仕)를 상소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1011년]](현종 2년) 궤장(几杖)을 하사(下賜) 받았다. [[1012년]]([[고려 현종]] 3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으로 강화백(江華伯)에 봉해졌다. 사후 내사령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안공이다. 묘소는 [[강화군]] [[강화읍]]에 있으며 10월 9일 향사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1292 강화 위씨 - 네이버 지식백과]</ref>
 
조선조에 의령현감(宜寧縣監)과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事)를 역임한 위조(韋組)가 간신(奸臣)들의 모략으로 평안도 영유(永柔)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그 곳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자 그를 낙향시조(落鄕始祖)로 삼고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조선조에 인동현감을 지낸 위조를 1세조로 한다.
 
== 본관 ==
25번째 줄:
 
== 인물 ==
* '''[[위근영]](韋瑾英) : 고려 인종 때 소감(少監)을 역임했다.
* [[위원]]'''(韋元) : 고려 문신. [[1225년]]([[고려 고종]](高宗) 12년)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를 역임했다.
* '''[[위득유]]'''(韋得柔, ? ~ 1278년) : 고려 무신.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을 역임했다. 위득유는 병마지사가 되어 일본 정벌에 나갔다가 이키섬(壹岐島)에서 태풍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때 익사한 김신을 구출하지 않은 혐의로 도원수 김방경의 탄핵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합포(合浦)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설치하고 제1차로 일본을 정벌할 때, 지병마사로 참전하였다. 여·원연합군은 쓰시마섬[對馬島]을 공략한 후 일본 본토로 향하던 도중 규슈[九州]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 때 위득유는 김신(金侁)을 구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김방경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7년 김방경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과 모의하여 김방경이 반란을 꾀하기 위해 무기를 감춰두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그 결과 [[김방경]]은 홍다구(洪茶丘)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고 대청도로 유배되었고, 1278년(충렬왕 4) 위득유는 홍다구의 후원으로 상장군에 올랐다.
 
* '''[[위수징]]'''(韋壽徵, 1653년 ~ ?) :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 [[성균관]] 전적을 역임했다.
* '''[[위득유]]'''(韋得柔, ? ~ 1278년) : 고려 무신.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을 역임했다. 위득유는 병마지사가 되어 일본 정벌에 나갔다가 이키섬(壹岐島)에서 태풍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때 익사한 김신을 구출하지 않은 혐의로 도원수 김방경의 탄핵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합포(合浦)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설치하고 제1차로 일본을 정벌할 때, 지병마사로 참전하였다. 여·원연합군은 쓰시마섬[對馬島]을 공략한 후 일본 본토로 향하던 도중 규슈[九州]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 때 위득유는 김신(金侁)을 구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김방경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7년 김방경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과 모의하여 김방경이 반란을 꾀하기 위해 무기를 감춰두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그 결과 [[김방경]]은 홍다구(洪茶丘)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고 대청도로 유배되었고, 1278년(충렬왕 4) 위득유는 홍다구의 후원으로 상장군에 올랐다.
 
* '''[[위창수]]'''(1972년 ~ ) : 골프 선수
* '''[[위수징]]'''(韋壽徵, 1653년 ~ ?) :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 [[성균관]] 전적을 역임했다.
 
* '''[[위창수]]'''(1972년 ~ ) : 골프 선수
 
== 과거 급제자 ==
55번째 줄:
 
[[분류:한국의 성씨|위, 강화]]
[[분류:위씨]]
[[분류:강화 위씨]]
[[분류:경기도 소재 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