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마누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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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군주 ===
==== 즉위 초반 ====
[[파일:Denier sous Carloman Ier.jpg|thumb|left|카를로만 2세 시대의 네우스트리아, 부르고뉴의 데나리온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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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은 명목상 카를로만의 영토였지만 토착 귀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아키텐을 정벌한 [[샤를마뉴]]는 아키텐을 카를로만에게 넘기지 않고, [[769년]] [[아키텐]]에 [[가스코뉴]] [[공작]] [[루포 2세]]를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대리 통치하게 하였다. 카를로만은 아키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루포 2세]]와 갈등했다. 카를로만은 자신의 형 [[샤를마뉴]]가 자신의 부모 [[피핀 3세]]와 [[랑의 베르트라다]]가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형 [[샤를마뉴]]를 불법으로 태어난 사생아로 믿었다. 형 [[샤를마뉴]]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 샤를마뉴와의 갈등 ====
[[769년]] 초부터 [[770년]] [[1월]] 초까지 카를로만은 [[이탈리아]] 셀츠(Seltz)에 체류하고 있었다. [[770년]] [[1월]] 어머니 베르트라다는 [[리에 주]]에서 [[샤를마뉴]]와 부활절을 보내고 난 뒤, 셀츠(Seltz)에 있던 카를로만을 방문했다. 이때 [[샤를마뉴]]는 어머니 베르트라다가 동생 카를로만에게 협력할까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편 이 무렵 [[샤를마뉴]]는 꼽추 아들 [[피핀 4세]]를 낳은 [[이멜트루드]]를 폐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다른 딸 [[데시데리아]]와 결혼하였다. 샤를마뉴는 랑고바르드를 자신의 정치적 동맹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데시데리우스는 자신의 사위들 중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이는 곧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가 갈등하는 원인이 됐고, 샤를마뉴가 랑고바르드와 전쟁을 하는 원인이 된다.
[[769년]] [[1월]] 카를로만은 [[롬바르디아 왕국]]을 방문했다. [[769년]] 초부터 [[770년]] [[1월]] 초까지 카를로만은 [[롬바르디아]] 셀츠(Seltz)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목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롬바르디아 왕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를로만은 롬바르디아 왕국의 지원을 확정받았지만, [[교황 스테파노 3세]]는 카를로만에 대해 걱정하였다. 롬바르디아의 왕 데시데리우스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카를로만을 칭찬하였고, 카를로만이 안전하게 자신의 영지로 귀국할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아인하르트는 카를로만이 형 샤를마뉴와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려 했다고 지적했는데, 아인하르트는 카를로만의 이탈리아 방문을 형 [[샤를마뉴]]와의 전쟁을 준비하려 한 것으로 인식했다.
 
[[769년]] 초부터 [[770년]] [[1월]] 초까지 카를로만은 [[이탈리아]] 셀츠(Seltz)에 체류하고 있었다. [[770년]] [[1월]] 어머니 베르트라다는 [[리에 주]]에서 [[샤를마뉴]]와 부활절을 보내고 난 뒤, 셀츠(Seltz)에 있던 카를로만을 방문했다. 이때 [[샤를마뉴]]는 어머니 베르트라다가 동생 카를로만에게 협력할까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편 이 무렵 [[샤를마뉴]]는 꼽추 아들 [[피핀 4세]]를 낳은 [[이멜트루드]]를 폐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다른 딸 [[데시데리아]]와 결혼하였다. 샤를마뉴는 랑고바르드를 자신의 정치적 동맹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데시데리우스는 자신의 사위들 중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카를로만을 지지했다. 이는 곧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가 갈등하는 원인이 됐고, 샤를마뉴가 랑고바르드와 전쟁을 하는 원인이 된다.
 
===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