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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uXun.jpg|thumb|200px|육손]]
'''육손'''(陸遜, [[183년]] ~ [[245년]] [[음력 2월|2월]]<ref>허숭(許嵩), 《건강실록(建康實錄)》</ref>)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 (삼국)|오나라]]
== 생애 ==
=== 초반 ===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인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강동 지역을 다스려온 호족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종조부인 여강 태수 [[육강]]
오나라에서 육손은 관직으로 진출하여 현의 관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등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진력하였다.<ref>오서13 육손전</ref> 또 오나라는 당시 이민족의 숱한 습격으로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는데, 육손은 주민들 가운데 지원병을 모집해 쳐들어오는 이민족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투항하는 자는 자기 군세에 가담시켰다. 육손의 그러한 활동에 주목하던 [[손권]]은 그에게 형 [[손책]]의 딸을 시집보내어 친분 관계를 맺고 종종 정치적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였다. 육손의 ‘이민족을 하나둘씩 평정하여 그 가운데서 정예병을 선발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은 손권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 실행을 육손에게 맡겼다. 그래서 각지의 이민족은 육손에 의해 점차 토벌되어 정예병으로 흡수되었다.
=== 관우와의 대립 ===
오나라와 [[촉한]] 간에 형주를 둘러싼 대립이 일어나고 있던 도중
여몽의 후임이 된 육손은 관우에게 매우 겸손한 내용의 서신을 보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안심하고 [[위 (삼국)|위나라]]를 침공한 관우는 여몽의 계략에 허를 찔러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되고 만다.
=== 이릉 대전 ===
이 소식을 들은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약 5만 혹은 8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 유비
유비가 병으로 죽자 오나라와 촉한은 촉한의 사신인 [[등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위나라에 대항하게 된다. 손권은 군사 면에서 육손은 오나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어 위나라가 종종 오나라를 침공해오지만 그 때마다 육손의 전략으로 가까스로 저지시켰다. 그 후 오나라 신료들의 맹활약 덕분에, 마침내 손권은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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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강]] [[육개]] [[육모]] [[육적]] [[육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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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전임후임
|전임자 = [[고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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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삼국지 오나라의 정치인]]
[[분류:삼국지 오나라의 장군]]
[[분류:손씨 일가와 주변 인물]]
[[분류:장쑤 성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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