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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rmeniansOnDeportationMarch.jpg|thumb|150px|1915년과 1923년 사이 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박해와 학살을 피해 고향을 떠났다.]]
1951년의 난민 협약을 소급해서 적용하자면 과거에도 "난민" 개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령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금지법인 낭트칙령이 폐지되고 [[개신교회]]와 [[학교]]까지 닫히자 수십만 명의 [[위그노]]들이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남아프리카]], [[독일]], [[프로이센]], [[미국]]으로 도주해야했다. [[동유럽]]에서
최초의 국제적인 난민 업무 협력은 [[국제 연맹]] 난민 고등 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프리티오프 난센]]이 이끈 이 위원회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이후의 내전(1917-1921)으로 발생한 1,500,000여 명의 피난민을 구호하기 위해 [[1921년]]에 창설되었다.(이들 중 대부분은 공산 정권을 피해 달아난 황제파였다) [[1915년]]과 [[1923년]]에 터키 지배하의 [[소아시아]]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으로 탈출한 백만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도 [[1923년]] 이 위원회의 위임을 받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아시리아]]인과 [[터키]] 피난민들도 지원을 받게 된다. 이 모든 사례에서 난민이란 일반적 정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국제 연맹이 위임한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국제 사회가 추진하여 감독한 [[로잔 조약]]에 따라 이루어진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그리스와 터키의 인구 교환]]의 대상자는 약
미국 의회는 1921년 비상이민할당법(Emergency Quota Act)이, 1924년에는 이민법이 통과되었다. 1924년 이민법은 남부와 동부 유럽인 이민자, 특히 1890년대에 미국으로 많이 밀려온 유대인,
1930년 난민 고등위원회의 뒤를 이어 난센 국제 난민 사무소(Nansen International Office for Refugees)가 설립되었다. 이 기관의 가장 큰 성과는 난민을 위한 여권인 [[난센 여권]]으로, 덕분에 1938년 이 기관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난센 사무소는 자금 지원이 불충분했으며, 난민의 수는
== 제2차 세계대전과 UNHC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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