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덕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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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이름= 방덕룡 <br> 方德龍
|생애= [[1561년]] ~ [[1598년]]
|그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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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룡의 부인은 [[진주 강씨]](晉州 姜氏) 박사공파 12세손 [[강응서]](姜應瑞)의 딸이다. 장인인 강응서(姜應瑞)는 생원(生員), 과의교위(果毅校尉)를 지내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관 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兼 經筵官 叅贊官)에 증직되었다.<ref>[http://kangssi.kr/cham/pan/panseo-1.htm 진주 강씨 인터넷 전자 족보]</ref>
[[1588년]]([[조선 선조]] 21년) 방덕룡은 28세의 나이로
[[1592년]] 3월부터 1595년 10월까지 정의(旌義) 현감을 역임하였다.<ref>濟州大靜旌義邑誌 旌義縣 先生案</ref>
[[1596년]]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였다.<ref>성해응(成海應,1760년-1839년), 硏經齋全集 卷之17 방낙안전(方樂安傳)</ref>
[[1597년]] 6월 28일부터
[[1598년]](선조 31년) 방덕룡은 낙안군수(樂安郡守)로 재직 중, 5월 25일 흥양(興陽) 지방에 왜선이 들이닥쳐 노략질하고 6월 6일에는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자, [[명나라]] 장수 이천총(李千總)과 합세해서 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ref>《선조실록》 102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7월 6일(기축) 1번째 기사</ref>
당시 통제사 [[이순신]]은 낙안군수 방덕룡이 용감하고 지략이 있다고 하여 선봉장으로 삼았다.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露梁海戰)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흥양 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과 함께 결사적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적을 무찔렀으나, 왜군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ref>《선조실록》 106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27일(무신) 5번째 기사</ref>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 선조|선조]]가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 [[형조]][[참의]]를 추증하고, 대대로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방덕룡의 아들 방전(方倎, [[1583년]] ~ ?)은 [[광해군]] 8년([[1616년]]) 증광(增廣)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동시 합격하여<ref>『만력44년병진3월증광사마방목(萬曆四十四年丙辰三月增廣司馬榜目)』</ref> 강릉 참봉(參奉)을 지냈다.▼
▲[[조선 선조|선조]]가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 [[형조]][[참의]]를 추증하고, 대대로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방덕룡의 아들 [[방전]](方倎, [[1583년]] ~ ?)은 [[광해군]] 8년([[1616년]]) 증광(增廣)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동시 합격하여<ref>『만력44년병진3월증광사마방목(萬曆四十四年丙辰三月增廣司馬榜目)』</ref> 강릉 참봉(參奉)을 지냈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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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조부 : [[정언각]](鄭彦慤, 1498년~1556년) - [[직제학]], [[경기도]][[관찰사]]
** 외조모 : [[고령 신씨]](高靈申氏) - [[이조]][[판서]] [[신공제]](申公濟)의 셋째 딸
*** 모 : [[해주 정씨]](海州鄭氏)
*** 처부 : [[강응서]](姜應瑞, ? ~ 1617년) -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관 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兼 經筵官 叅贊官)
**** 부인 : [[진주 강씨]](晉州姜氏)
***** 아들 : 방검(方儉)
***** 아들 : 방전(方倎, [[158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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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선의 무신]]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
[[분류:조선의 군인]]
[[분류:임진왜란 관련자]]
[[분류:정유재란 관련자]]
[[분류:온양 방씨]]
[[분류: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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