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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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그는 1859년 10월
아버지는 작곡가였으나 그렇게 신통하지는 않아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8년,
그는 한 마디로 말해 천재였다.
베르그손은 19세 때 파리[[프랑스의 교육제도|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한다. 고등사범학교는 인문학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프랑스의 영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장 폴 사르트르|샤르트르]], [[자크 데리다]], [[장 조레스]] 등 수많은 명사를 배출한 곳이다. 베르그손은 당시에 수석인 [[장 조레스]]에 이어 3등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22살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Agregation)에 2등으로 합격하여(3등은 장 조레스) 앙제 고등학교에 철학 교수로 발령된다. 후에 끌레르몽-페랑,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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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르본느]] 대학 교수직에 2번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39살 때 고등사범학교 전임강사, 41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의 그리스-라틴 철학 담당 교수, 1904년에는 현대철학 교수가 된다. 이후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는 등 철학 교수로서 활발히 활동을 벌이게 된다. 1917년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설득하러 외교관으로 미국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의 저서들은 매우 유려한 문체와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매우 높아, 주저중 하나인 [[창조적 진화]]등의 주저들이
62살 때에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이듬해에는 현 UNESCO의 전신인 국제 지적 협력 국제위원회(CICI) 회원이 되었다. 8월에는 의장에 올랐다.
그가 63살
이어 그가 68살 때인 1928년에는 그간의 공로와 꾸준히 찬사를 받아오던 문장력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는 죽을 때까지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81살 때에 파리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 사상 ==
그는 인간의 생명을 가장
인간과 사회에 관한 그의 관점 또한 '시간', '변화', '운동' 에 중점을 두고 재해석한 것이다. 종교에는 고정적인 제도, 고로 폐쇄적이게 되는 종교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개방적 종교가 있다고 하여 후자가 필연적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도덕에 관한 관점 또한 기존의 고정되어 있는 전통적 도덕의 체계보다 시시각각 움직이고 계속 변화되어 가는 원칙을 가진 유기체적 도덕의 우수성을 옹호하였다. 사회에 대한 관점에서도 그는 고정되고 닫힌 폐쇄된 사회보다는 변화되고 움직이는 '열린 사회'를 주장하였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 사회'라는 용어가 그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사회철학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이라는 그의 마지막 주저에 서술 되어 있는데, 베르그송은 이 마지막 저서를 1932년, 그의 나이 73세때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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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플라톤 이후 2000년 넘게 이어져왔던 물질들의 "정지"를 전제로 한 존재론 위주의 철학적 담론을, 베르그송은 당대의 최첨단의
[[고대 그리스]]에서는 학문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운동을 되도록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학문이라는 것은 일종의 분석작업이고, '분석'이 가능하려면 [[동일률]](자기동일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학문이 탐구할 대상은, 분석하기 이전과 이후가 동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탐구대상이 분석 과정중에 변화한다면, 분석의 의미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모든것은 매순간 계속 변하고 있고, 한순간도 정지가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학문은 불가능하다. 정지는 고대인들의 상식적인 경험에도 비추어 보아도 올바르게 보였고, 학문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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