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무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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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무 천황'''({{ja-y|天武天皇|てんむてんのう}})은, [[7세기]] 후반의 [[일본]]의 천황이다. 재위는 덴무 천황 2년([[673년]]) 2월 27일(양력 [[3월 20일]])에서 [[슈초]](朱鳥) 원년([[686년]]) 9월 9일([[10월 1일]])까지였다. 《황통보》(皇統譜)<ref>일본의 천황 및 황족의 신분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는 장부. 제작 형식은 일본의 황실전범 및 황통보령으로 정해져 있다. 천황과 황후, 황태후에 관한 사항을 취급하는 대통보(大統譜)와 나머지 황족에 관한 사항을 다루는 황족보(皇族譜)의 두 종이 있으며, 이것으로 황실의 신분 관계(가족관계) 및 황통을 공증한다.</ref> 에 정해진 대수에는 제40대 천황이라 지목하고 있다.
 
형인 [[덴지 천황]]이 죽은 뒤, [[672년]]에 [[임신의 난]]을 일으켜 조카 오오토모오토모 황자(大友皇子, [[고분 천황]])를 몰아내고 그 이듬해에 천황으로 즉위했다. 치세는 14년. 즉위 기간은 13년에 걸친다.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飛鳥浄御原宮)를 지었고 뒤를 이은 지토 천황의 시대와 아울러 덴무·지토조 등의 단어로 일괄되곤 한다. 이 시대는 일본의 통치 기구와 종교, 역사, 문화의 원형이 만들어진 중요한 시대로 평가받고 있으며, 덴무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토 천황의 통치도 기본적으로 덴무 천황의 노선을 이어받아 완성시킨 것으로, 그 발의는 덴무 천황에게서 많이 나온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하쿠호(白鳳) 문화의 시대이다. 인사면에서는 황족을 요직에 임명하고 다른 씨족을 하위에 두는 황친정치를 행했지만, 그 자신도 황족에게 제약받지 않는 전제군주로서 군림했다. [[팔색성|야쿠사노 카바네]](八色之姓)를 제정하여 기존의 우지(氏)·카바네(姓) 제도를 재편하는 한편, 율령제 도입을 향한 제도 개혁을 진행시켰다.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飛鳥浄御原令)의 제정과 새로운 수도([[후지와라쿄]]) 축조 및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편찬은 덴무 천황이 시작하여 그 사후에 완성한 사업이다.
 
도교에 관심을 두고 [[신토]](神道)를 정비하여 국가 신도를 확립, 불교를 보호해 국가 불교를 추진했다. 그 외 일본 토착의 전통 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天皇'을 칭호로 삼고 '日本'을 국호로 정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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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의 유래 ====
덴무 천황의 휘는 오오아마오아마(大海人)이다. 어려서 오오아마오아마 씨(凡海氏)<ref>가이후 일족의 도모노 미야쓰코</ref>로부터 양육받은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직접적으로 그렇게 휘를 적은 것은 아니지만, 덴무 천황이 죽었을 때 그의 빈소에서 오오아마노오아마노 아라카마(凡海麁鎌)가 임생(壬生)를 뇌한 것에서 이렇게 추측한다.
 
일본식 시호는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ja-y|天渟中原瀛真人天皇|あまのぬなはらおきのまひとのすめらみこと}}'''). 「오키(瀛)」는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동방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마히토({{ja-y|眞人|まひと}})」란 뛰어난 도사를 뜻하며 모두 도교적인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풍 시호인 「덴무(天武)」는 역대 천황들과 마찬가지로 [[나라 시대]](奈良時代)에 [[오우미노 미후네]]에 의해 찬진되었다. 근대에 [[모리 오가이]]는 중국의 《[[국어 (역사서)|국어]]》(國語) 초어(楚語) 하(下)에 나오는 「천사(天事)는 무(武), 지사(地事)는 문(文), 민사(民事)는 충(忠) · 신(信)이라」라는 구절에서 「덴무」라는 시호가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로 [[전한]](前漢)의 [[한 무제|무제]](武帝)를 모방했다는 설과 「하늘이 [[주 무왕|무왕]](武王)을 세워 나쁜 왕([[주왕]])을 멸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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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아마의 아버지인 [[조메이 천황]]은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죽었다. 형인 나카노오에가 고교쿠 4년(645년) 6월 12일에 20세의 나이로 을사의 변을 일으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참살했을 때, 오오아마는 나이가 어려 음모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사건의 결과로 소가씨 본종가는 몰락하고 퇴위한 [[고교쿠 천황]]의 뒤를 이어 [[고토쿠 천황]]이 즉위했다. 그 뒤 [[하쿠치]] 4년(653년)에 고토쿠 천황이 사이가 틀어진 나카노오에가 나니와(難波)에서 야마토(倭)로 옮길 때 행동을 함께 했었다.<ref>《일본서기》하쿠치 4년조. 이하 사실도 기본적으로 《일본서기》를 따라 기록한다.</ref> 이윽고 고토쿠 천황이 병으로 죽자, 퇴위했던 고교쿠 천황이 복위하여 [[사이메이 천황]]이 되었다.
 
오오아마는 황태자가 된 형 나카노오에의 딸을 차례대로 네 명까지 아내로 맞이했다.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원병 파병문제로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과 형 나카노오에가 지쿠시(筑紫)로 궁을 옮길 때 오오아마도 아내를 데리고 함께 갔다. 그 여행중인 사이메이 7년(661년) 1월 8일에, 아내 오오타노오타노 히메미코(大田皇女)는 오오쿠노우미오쿠노우미(大伯海)<ref>지금의 일본 [[오카야마 현]] 동부에 해당하는 곳이다.</ref> 에서 딸 오오쿠노 히메미코(大伯皇女)를 낳았다. 다른 황자인 오오쓰 황자(大津皇子)의 이름도 치쿠시의지쿠시의 나오쓰(娜大津)<ref>지금의 일본 [[후쿠오카 시]]이다.</ref> 에서 태어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왕녀 누카타(額田)를 아내로 삼아 자식을 두었는데, 누카타노 오오키미는오키미는 나중에 나카노오에의 왕비가 되었다. 이 삼각 관계가 훗날 형제가 불화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다.
 
=== 덴지 천황의 즉위와 황태제(皇太弟) 책봉 ===
사이메이 천황이 죽은 뒤, 나카노오에는 즉위식을 행하지 않고 칭제의 형식으로 통치했다. 덴지 3년([[664년]]) 2월 9일에, 오오아마는 나카노오에의 명으로 관위 26계제를 시행하고, 우지카미(氏上)을 인정하며 민부(民部)와 가부(家部)를 정하는 것을 군신에게 선포했다. 덴지 6년([[667년]]) 2월 27일에 간신히 사이메이 천황의 장례 의식이 이루어졌는데, 하시히토노 히메미코(間人皇女)가 사이메이 천황과 합장되었고 오오타노오타노 히메미코가 그 능 앞에 묻혔다. 모두 오오아마에게는 어머니, 누나(혹은 여동생) 그리고 아내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7년([[668년]]) 1월 7일, 나카노오에는 비로소 즉위식을 거행했다. 《일본서기》 권28 덴무 천황 즉위전기에는 이때 오오아마가오아마가 동궁이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같은 책의 권27 덴지키(天智紀)에는 이 기록이 없다. 덴지키 안에서 오오아마는오아마는 「대황제(大皇弟)」, 「동궁태황제(東宮太皇弟)」, 「동궁(東宮)」 등으로 기록된다. 《일본서기》는 임신의 난 이전부터 오오아마를오아마를 '천황'으로 적는 등, 그의 지위에 관해서는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기록대로 오오아마가오아마가 처음부터 황태자의 지위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대황제」 등의 단어는 임신의 난으로 정권을 찬탈한 덴무 천황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식으로 실제로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설, 단순한 존칭일 뿐 황위계승 예정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설 등, 오오아마의오아마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의심하는 설도 유력하다.
 
그가 황위 계승자로 인정되고 있었는가 어쨌는가의 문제를 떠나, 일단 덴지 천황의 조정에서 그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지도 않다.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집안 전승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 보면, 어느 날 궁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취기로 형왕(兄王)에 대한 감정이 격해진 오오아마가오아마가 장창을 가져다 덴지 천황이 보는 앞에서 상판(床板)에 꽂았으며, 격노한 덴지 천황이 그를 죽이려는 것을 [[내대신]](內大臣)이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의 만류로 무사했다고 전한다. 이 일은 덴지 천황 7년([[668년]])의 일로 추측되고 있다.
 
덴지 10년([[671년]]) 1월 2일, 덴지 천황은 아들 [[고분 천황|오오토모노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를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사다이진좌대신]](左大臣) · [[우다이진우대신]](右大臣)과 [[다이나곤|어사대부]](御史大夫)를 보좌로 붙였다(《해동제국기》). 태정대신은 국정을 총람하는 관직으로서 그 직무는 기왕에 오오아마가 해온 일들과도 겹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는 이 직후에 「동궁태황제가 관위 · 법도를 시행시켰다」고 적었지만, 「어떤 책에 이르기로는(或本云)」 하고 운을 떼며 오오토모가 이것을 했다고 주하고 있다. 또한 《회풍조》(懐風藻)는 오오토모가 덴지 10년에 황태자가 되었다고 적었다. 일본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주석으로 달린 「어떤 책」 쪽을 택하거나, 이 기사를 덴지 3년([[664년]]) 2월 9일의 관위 26층제의 중출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오오토모의 태정대신 임명과 더불어 오오아마는오아마는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소외된 것으로 보인다. 오오토모가오토모가 태정대신으로서 오오아마의 직무를 행하게 된 것은 오오토모에게오토모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는 덴지 천황의 의도가 강하게 표출된 것이라는 데에는 반론이 없다.
 
=== 임신의 난 ===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은 병이 깊어진 10년([[671년]]) 10월 17일에 오오아마를오아마를 병상에 불러 "내 병이 심하니 뒷일은 너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미리 측근인 소가노 야스마로(蘇我安麻呂)의 경고를 받은 오오아마는오아마는 "황후(야마토히메노 황후)에게 즉위하게 하시고 오오토모에게오토모에게 여러 정사를 행하게 하소서. 신은 천황을 받들어 출가수도하고자 합니다."라며 사양했다. 그리고 그 날 오오아마는오아마는 삭발하고 요시노(吉野, 지금의 일본 [[나라 현]])로 낙향했다. 요시노에서 그는 우노노사가라노 히메미코와 [[구사카베 황자]] 등의 가족, 소수의 사인과 궁녀를 거느리고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편 오미의 오쓰노미야(大津宮, 오늘날의 일본 [[오쓰 시]])에서는 덴지 천황의 뒤를 이어 오오토모가 조정의 일을 맡아 후계가 되었다.(다만 즉위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듬해인 [[672년]] 6월 22일, 오오아마는오아마는 요시노에서 거병을 결의하고, 무라쿠니노 오요리(村國男依) 등을 [[미노 국|미노]]에 사자를 파견했다. 그리고 이틀 뒤 그 자신은 몇 명의 측근만을 거느린 채 뒤를 따랐다. 오오아마는오아마는 후와(不破)의 길을 봉쇄해 오미 조정과 도고쿠(東國) 사이의 연락을 차단한 뒤, 군사를 일으키는 사자를 히가시야마(東山, [[시나노 국|시나노]] 등지)와 도카이의 [[오와리 국|오와리]] 등지에 보냈다. 그리고 야마토 분지에서 오오토모노오토모노 후케이(大伴吹負)가 거병, 아스카의 야마토쿄(倭京)을 급습해 점령했다. 이윽고 도고쿠에서 수만의 군세가 후와에 집결, 오미와 야마토 두 길로 진군했다. 오미 방면으로 진군한 군세가 [[비와 호]] 동쪽을 돌아 [[세키가하라 정|세키가하라]]를 비롯한 각지에서 조정측 군사들을 수차례 격파한 끝에, 7월 23일 오오토모는오토모는 자결하고 난은 막을 내렸다.
 
=== 치세 ===
오오토모가오토모가 죽은 뒤에도 오오아마는오아마는 한동안 미노에 머무르며 전후 처리를 모두 끝낸 다음에야 아스카의 시마 궁(島宮)을 거쳐 오카모토 궁(岡本宮)에 들어갔다. 여기에 더해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이 대극전(大極殿)을 지었다(두 궁을 아울러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이라 이름붙인 것은 만년의 일). [[673년]] 2월 27일에 즉위식을 거행한 천황은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를 황후로 삼고<ref>황후는 이미 임신의 난 때부터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그에게 조언했다</ref>, 재위 기간에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정무를 살폈다.<ref>조정의 요직은 주로 황족들이 맡았는데, 이것을 황친정치라고 한다.</ref> 또한 천황은 딸 오오쿠노오쿠노 히메미코(大来皇女)를 [[사이오]]로서 [[이세 신궁]]을 모시게 하고<ref>이세 신궁에 대해서는 임신의 난을 승리로 이끌게 도와주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ref>, 앞서 조메이 천황이 지었던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옮겨 타카이치노오데라다카이치노오데라(高市大寺)로 삼는 등 신도와 불교를 아울러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덴무 천황의 여러 정책은 아래에 설명하였다.
 
황자들이 성장하자 덴무 8년([[679년]]) 5월 5일에 황후와 덴무 천황 소생 4명, 덴지 천황 소생의 2명과 함께 요시노노미야로 가서 6일에 그곳에서 천황과 황후는 여섯 명을 한 부모를 둔 자식처럼 대우하고 자식들끼리는 서로 협력한다는, 요시노 맹약을 행했다. 하지만 6명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구사카베노 황자가 첫 번째, 오오쓰오쓰 황자가 다음, 가장 연장자였던 다케치 황자(高市皇子)가 세 번째로 맹세했으며 이 서열은 덴무 천황의 치세 내내 유지되었다. 덴지 천황의 소생은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덴무 천황의 소생인 구사카베는 덴지 천황의 딸 아베노 히메미코(阿閉皇女, 훗날의 [[겐메이 천황]])와 혼인했고, 오오쓰는오쓰는 야마베노 히메미코(山辺皇女)와 혼인했다. 덴지 천황의 소생인 가와시마 황자(河島皇子)는 덴무 천황의 딸인 하쓰세베노 히메미코(泊瀬部皇女)와 결혼했다.<ref>덴무 천황의 황후도 덴지 천황의 딸이었기에, 덴지·덴무 양계는 중첩적인 근친혼관계로 서로 엮인 셈이다.</ref>
 
천황과 황후는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에 율령을 정할 계획을 세웠고, 동시에 구사카베노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다. 하지만 12년([[683년]]) 2월 1일부터는 오오쓰노오쓰노 황자에게도 조정의 일을 맡게 했다. 오오쓰노 황자는 여러 가지 재능이 많다는 칭송이 있었다. 재위 14년만인 덴무 15년([[686년]]) 5월 24일, 덴무 천황은 병을 얻었다. 불법의 영험을 빌어 쾌유를 빌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황후와 황태자에게 7월 15일에 정치를 위임했다. 7월 20일에는 새로운 연호가 슈초(朱鳥)로 정해졌다. 그 뒤로도 신불에 쾌유를 비는 것은 이어졌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9월 11일에 덴무 천황은 숨을 거두었다.
 
=== 장례와 능묘 ===
덴무 천황이 죽고 한 달이 지난 10월 2일에 오오쓰노 황자가 모반 혐의로 붙잡혀 바로 다음날 처형되었다. 빈소에 모셔진 시신은 오랫동안 매장되지 않고, 황태자가 백관을 인솔해 몇 번이나 의식을 반복해 지토 2년([[688년]]) 11월 21일에야 오우치 능(大内陵)에 묻혔다. 지토 3년([[689년]]) 3월 13일에 구사카베 황태자가 죽었으므로, 황후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가 천황으로 즉위했다(지토 천황). 능은 히노키기미오오우치히노키기미오우치 능(檜隈大内陵, 지금의 일본 나라 현 [[다카이치 군]] 아스카무라 오오치노구치), 노구치 오우노하키(野口王墓) 고분. 지토 천황의 무덤과 함께 조성된 부부합장릉이다. 일본 고대 천황의 능으로서는 드물게 그 능묘 비정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여겨지지만, 가마쿠라 시대인 [[분랴쿠]](文曆) 2년([[1235년]])에 도굴당해 대부분의 부장품을 도둑맞았다. 관도 외부 공기에 노출되었지만 유해는 그대로 보전되었는데, 천황의 두개골에 그때까지도 흰 머리카락의 흔적이 남아 붙어 있었다고 한다. 지토 천황의 유골은 화장되어 은으로 만든 유골함에 담겨져 있었지만, 유골함만 도굴범이 훔쳐가고 유골은 근처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졌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일기 《메이게쓰키(明月記)》에 도굴의 전말이 실려 있다. 또한 도굴당했을 때 작성된 《아부키나이 산릉기(阿不幾乃山陵記)》에 석실의 모습이 실려 있다.
 
==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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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제개혁 ===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은 덴무 2년([[673년]]) 5월 1일, 천황은 처음으로 궁정에서 일할 사람을 대사인(大舍人)으로 하여, 재능에 따라 직무를 맡기는 제도를 준비했다. 아울러 부녀로서 바라는 사람에게는 모두 궁에 들어와 근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ref>《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처음으로 [[다이나곤대납언]](大納言) · [[츄나곤중납언]](中納言)을 둔 것은 이 해의 일이다.</ref> 덴무 5년([[674년]]) 1월 25일에는 [[기나이]](畿內) · [[무쓰 국|미치노쿠]](陸奧) · [[나가토 국|나가토]](長門) 이외의 고쿠시는 다이산(大山) 이하로만 임명하도록 정했다(이는 관위상당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기나이 이외의 다른 구니의 오미(臣) · 무라치(連) ·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 구니노 미야쓰코(國造)의 자손과 재능이 뛰어난 서민이 궁에 출근하는 것을 허락했다. 7년([[678년]]) 10월 26일에는 매년 관리의 고선(考選, 근무평가제)을 행하여 그에 따라 위계를 올려주는 제도를 정하고, 그 사무를 법관, 법관의 관리는 대변관(大弁官)이 맡도록 했다. 14년([[685년]])에는 새로운 관위를 정했다.<ref>이렇게 정돈된 관제도 태생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덴무 11년([[682년]]) 8월 22일에 천황은 근무평가에 있어서는 해당 인물의 족성을 제1기준으로 하도록 명하고 있다. 태생의 귀천도 관료제 안에 포함되었다.</ref>.
 
덴무 10년(681년) 2월 25일, 천황은 율령을 정하고 법식을 고치는 대사업에 착수했다. 이는 관리들에게 분담시켜 진행되었지만 천황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지토 3년([[689년]]) 6월 29일에야 영(令)만 발포되었다(아스카 기요미하라 령). 관위 제도는 덴지 천황이 정한 다이치(大織)에서 쇼켄(小建)까지의 관위 26계제를 답습했다. 덴무 천황 당시를 살았던 신하들이 받은 관위는 미노노 오오키미오키미(美濃王)와 다이마노 도요하마(當麻豊浜)가 받은 쇼쟈(小紫)가 기록상 보이는 가장 높은 것이다.<ref>사후에 추증되는 관위는 이보다 높은 것으로도 하사되곤 했다.</ref>. 이와 병행해 덴무 4년([[675년]]) 3월 16일에 처음 보이는, 여러 황족을 대상으로 하여 4,5위 등 숫자에 '위'를 붙이는 위계도 만들어졌다. 기록상 덴무 당시의 황족들이 받은 위로서는 3위에서 5위까지가 보이고 있다.<ref>황자에게는 위가 내려지지 않았다.</ref>. 덴무 14년(685년) 1월 21일에 새로운 관위 48층제를 정했다. 황족과 신하에서는 다른 위계가 마련되어 있었고 황태자에게도 하사되었다. 실제로 하사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위는 구사카베 황자에게 내려진 세이코이치(淨廣壹)이다.<ref>메이(明)·세이(淨)·쇼(正)·지키(直) 등은 수식어다. 모두 신도에서 존경하는 가치로서 천황 자신의 도덕 및 종교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ref>.
 
덴무 천황이 확립한 여러 제도는 후대의 [[다이호 율령]]이나 요로(養老) 율령과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지만 실질적인 의의나 내용은 같으며, 이는 율령관인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또한 덴무 천황 당시의 관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정무를 논의하는 여러 명의 나곤납언(納言)으로 구성된 태정관(太政官), 그 아래에 민관(民官) ・ 법관(法官) ・ 병정관(兵政官) ・ 대장(大蔵) ・ 이관(理官) ・ 형관(刑官)의 6관과 나머지 다른 관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자에 따라 덴무조가 가지는 의의를 다르게 평가하는 것도 있지만, 덴무 정권 아래서 일본 율령체제의 기초가 정해졌다는, 덴무조의 의의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 씨족 및 민정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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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부친 : [[일본]] 제34대 [[죠메이 천황]](舒明天皇, 593~641)
* 모친 : [[일본]] [[고교쿠 천황]] 타카라노황녀다카라노황녀(皇極天皇 宝皇女, 594~661)
** 황후 : [[일본]] 제41대 [[지토 천황]] 우노노사라라노 황녀(持統天皇 鸕野讃良皇女, 645~703)
*** 차남 : 오카노미야교우천황 쿠사카베노황자구사카베노황자(岡宮御宇天皇 草壁皇子, 662~689)
**** 손녀 : [[일본]] 제44대 [[겐쇼 천황]](元正天皇, 680~748)
**** 손자 : [[일본]] 제42대 [[몬무 천황]](文武天皇, 683~707)
**** 손녀 : 키비내친왕기비내친왕(吉備内親王, ?~729)
** 비 : 오오타노황녀오타노황녀(大田皇女, ?~667) - 황후 [[지토 천황]](皇極天皇)의 동모 언니
*** 차녀 : 오오쿠노황녀오쿠노황녀(大来皇女, 661~701)
*** 3남 : 오오츠노황자오쓰노황자(大津皇子, 663~686)
** 비 : 오오에노황녀오에노황녀(大江皇女, ?~699)
*** 7남 : 나가노황자(長皇子, ?~715)
*** 9남 : 우게노황자(弓削皇子, ?~699)
** 비 : 니이타베노황녀(新田部皇女, ?~699)
*** 6남 : [[도네리 친왕|토네리친왕]](舎人親王, 676~735)
**** 손자 : [[일본]] 제47대 [[준닌 천황]](淳仁天皇, 733~765)
** 부인 : 히카미노이라츠메(氷上娘, ?~682)
*** 딸 : 타지마노황녀다지마노황녀(但馬皇女, ?~708)
** 부인 : 이오에노이라츠메이오에노이라쓰메(五百重娘) - 후지와라씨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614~669)의 딸
*** 10남 : 니이타베노친왕(新田部親王, ?~735)
** 부인 : 오호누노이라츠메오호누노이라쓰메(大蕤娘, ?~724) - [[소가노 아카에]](蘇我赤兄, 623~?)의 딸
*** 5남 : 호즈미친왕(穂積親王, ?~715)
*** 딸 : 키노황녀기노황녀(紀皇女)
*** 딸 : 타카타노황녀다카타노황녀(田形皇女, 674~728)
** 채녀 : 누카타노왕(額田王) - 카가미노왕(鏡王)의 딸
*** 장녀 : 토오치노황녀도오치노황녀(十市皇女, 653?~678) - [[고분 천황]](弘文天皇, 648~673)의 황후
** 빈 : 아마코노이라츠메(尼子娘) - 무나카타노 토쿠젠도쿠젠(胸形徳善)의 딸
*** 장남 : 타케치노황자다케치노황자(高市皇子, 654?~696)
** 궁인 : 카지히메노이라츠메가지히메노이라츠메(カヂ媛娘) - 宍人大麻呂의 딸
*** 4남 : 오사카베노황자(忍壁皇子, ?~705)
*** 아들 : 시키노황자(磯城皇子)
*** 딸 : 하츠세베노황녀(泊瀬部皇女, ?~741)
*** 딸 : 타키노황녀다키노황녀(託基皇女, ?~751)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