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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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베네딕토 9세로 인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결혼하기 위해 교황직을 중도 사임한 그는 곧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고 다시 자신이 교황이 되겠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더해, 그레고리오 6세는 교회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냈고, 적지 않은 성직자에게서 목자다운 능력이나 품성을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고는 고뇌에 가득 찼다. 그렇지만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 신부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올바로 쇄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신과 교회회의라는 수단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애썼으며, 정치 사회 면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던 경쟁 파벌들의 세력은 너무나 막강해 쉽게 굴복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중재 외에는 당시 교회가 직면한 여러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고 인식한 수많은 고위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그레고리오 6세나 그와 경쟁 관계에 놓인 실베스테르 3세와 베네딕토 9세와의 친교를 단절하고, 당시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 [[하인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1046년 가을 이탈리아로 내려갔다.
 
성 페트루스 다미아누스도 그 교황에 대하여 처음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성직매매의 혐의가 있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그 사건에 개입하여 로마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은 북쪽으로 가서 [[피아첸차]]에서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교황을 정중히 대해 주었으나 교황직은 인정하지 않았다. [[1046년]] 12월 20일 수트리의 파비아와 로마에서 회의를 개최한 황제는 그들 모두를 폐위시켰다. 이리하여 그레고리오 6세는 황제의 명령으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 유배당하고 [[독일인]]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