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설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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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이다. 48세 때인 [[1935년]]에 [[금강산]] [[유점사]] 강주로 있다가 [[경성부]]의 유점사 경성포교당에 포교사로 부임해 오면서 처음 공식 기록에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로 올라와 포교 활동을 하던 중,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으로 인해 [[중국]]에서 전사한 [[일본군]] 전사자가 속출하여 서울로 유골이 운반되어 오기 시작했는데, 변설호는 용산의 [[조선군사령부]]에 가서 독경과 분향을 했다. 이런 일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계속되었고, 일본군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국방헌금을 헌납하였으며 출정하는 일본군을 직접 송영하는 등 전쟁 지원에 적극 참여하여 공을 인정받았다.
 
당시 합천 [[해인사]]가 선거를 통해 주지를 선출하고도 두 차례나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못해 주지직이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1938년]] 경찰관을 배석시켜 해인사 주지 선거를 실시하였고, 이 절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변설호가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총독부의 비호로 주지지에 당선된 변설호는 국방헌금 모금에 적극 나섰으나, 사찰의 부채를 정리하고 건물을 수리하여 신도를 모으는 데 노력도 기울여 [[1941년]] 주지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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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안병기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날짜=2007-12-21
|확인일자=2008-02-28
}}</ref>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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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임혜봉
|제목=친일 승려 108인
|발행일자날짜=2005-03-01
|출판사=청년사
|출판위치=서울
50번째 줄:
|저자=신형주
|출판사=만불신문
|작성일자날짜=2006-04-15
|확인일자=2008-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