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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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신복룡
|제목=한국사 새로 보기
|발행일자날짜=2001-12-20
|판=초판 2쇄
|출판사=도서출판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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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쇠표 = 예
|인용문=당쟁이란 삼사(三司: 司憲府·司諫院·弘文館)라고 하는 언로(言路)를 통하여 조정에서 벌어진 정치적 담론 과정이었다. 그러한 토론을 가리켜 당의(黨議)라고 불렀다. 당쟁이라는 용어 자체도 당의를 악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은 명칭이지 우리의 용어가 아니다.
}} </ref>.
 
== 연원 ==
 
붕당은 본래 [[중국]]에서 정치인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유교적 정치 이념하에서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범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 [[성리학]] 이념은 군자(君子)끼리 모인 '군자당'(君子黨)이 소인(小人)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지지했으므로 이를 받아들인 [[조선의 유학자]]들도 조선 중기 이후 붕당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ref> 한국사 특강, 175쪽. </ref>.
 
== 원인 ==
조선 시대에 붕당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둘째, 왕실 내척(王室內戚)의 내분, 셋째, 제도상의 결함이다. 특히 제도상의 결함은 양반의 수는 늘어가는데 양반에게 수급권을 줄 토지가 모자라게 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이 와중에 과전법은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기성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겨났다. 이는 달리 보면 [[훈구파]]와 [[사림|사림파]]의 대립이었다<ref>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관료의 대립과 분열〉, 당쟁. </ref>.
 
이러한 대립은 성종 때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연산군 때부터 차츰 불거지게 되었고, 결국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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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당의 형성 ===
{{본문|동서 분당}}
최초의 붕당 대립 구도의 성립은 [[1575년]]([[조선 선조|선조]] 8년)으로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 사림인 서인과 [[김효원(성암)|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신진 사림인 동인의 결집에서 비롯되었다. 심의겸이 서울 서쪽에, 김효원이 동쪽에 살았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ref> 한영우, 352쪽. </ref>. 서인과 동인의 분당은 문반 관료의 인사권을 쥔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심의겸의 아우([[심충겸]])와 김효원이 서로 다툰 데서 비롯되었다. 이조 전랑은 5품·6품의 낮은 자리이지만,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옥당)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임명되는 것이 관례로서, 삼사(三司)의 공론(公論)을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하고, 또 물러날 때에는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뿐 아니라,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따라서 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권력 경쟁의 핵심 과제였다.
 
이 사건에는 서인과 동인의 분당 배경에는 기성 관료와 신진 관료의 이해와 충돌, 학파와 지연의 차이, 그리고 척신 정치에 대한 강·온의 태도 차이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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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초에는 서인과 동인의 경쟁 체제가 유지되면서 큰 실정은 없었으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정여립 모반 사건)를 계기로 서인은 동인을 배제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동인 중 일부 급진 세력이 관련되었지만,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을 자극하여, 2년 뒤인 [[1591년]](선조 24)에 동인은 서인 [[정철]]이 세자 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실을 문제 삼아 정철 일파를 내몰았다(→[[건저문제]]).
 
그때 [[조선 선조|선조]]가 동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인은 세력을 회복하게 되고, 정철의 처벌 문제로 인해 강경파(급진파)인 [[이산해]] 중심의 [[남명 조식|조식]]·서경덕계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유성룡]] 중심의 [[이황]]계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졌다. 기축옥사 때 피해를 입은 세력이 조식·서경덕계였으므로 서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할 기미를 보이자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나, 당시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소모적인 정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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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쟁의 격화 ===
[[조선 숙종|숙종]]대에 이르러 상호 비판을 전제로 100년 가까이 공존하던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세 차례에 걸친 환국의 와중에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때, 붕당의 변질을 가져온 두 가지 문제가 예송과 환국이다. 예송은, 상복을 입는 기간에 관한 문제로, 효종과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효종의 모친이자 선왕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관한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까닭은, 인조와 그의 제 1비였던 인열왕후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왕이 되지 못하고 병사하여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했으나, 둘째 아들이었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1차 예송에서 효종이 죽었을 때, 서인은 효종이 둘째아들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1년 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이라는 데에 착안하여 3년 상을 주장하였다. 결국 서인이 승리하여 1년 상을 하는 것으로 하였다. 하지만 2차 예송에서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조대비(자의대비)가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여 1년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그로써, 서인은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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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영조]]는 즉위하던 해([[1724년]])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해 이전까지의 격렬한 당쟁은 영조대에 이르러 사라졌다. 또한 노론과 소론 양쪽의 주요 인물들을 외척으로 만들어 세력의 안정화를 꾀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탕평책을 지지하는 [[탕평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당파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선 정조|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표면적 안정에 중점을 두고 능력에 관계없이 양쪽을 고르게 등용한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국정의 철학으로 명절과 의리를 제시하고 자신의 국정 운영에 부합하는 세력(남인의 청남계, 노론의 청명당계 등)을 중용하였다<ref> 한국사특강, 185쪽. </ref>. 영조의 탕평책과 대비하여 정조의 탕평책은 준론탕평(峻論蕩平,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탕평책)이라 불린다<ref> 한영우, 391쪽. </ref>. 그러나 붕당 간의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새로운 당파를 형성하여 당쟁을 계속하였다.
 
=== 시파 대 벽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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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파의 분할 과정 ==
본래 조선에는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훈구파가 훨씬 권세가 컸으며 명종 시대까지 훈구파의 독재 정치가 시작되었다. 첫 붕당은 집안 내의 붕당으로서 파평 윤씨 일가인 윤임과 윤원형을 영수로 삼은 대윤과 소윤이다. 대윤과 소윤은 중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주요 당파로 있었으나 윤임과 윤원형의 죽음으로 당은 거의 사라졌다. 선조 이후부터는 사림파가 득세하였는데, 이때 동인과 서인으로 당대의 대학자 [[이이]]와 [[이황]]을 영수로 하여 나뉘었다. 두 당파는 동서분당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설 때까지 혼재한 상태였다.
 
이후 동인은 후에 이황의 제자인 남인과 그 외 인물은 북인으로 분할되었고, 이이의 당파인 서인은 나뉘는 동인으로 말미암아 세력이 넓어지는 듯했으나, 광해군 시절 정파로 자리잡은 북인에서 갈라진 대북과 소북으로 말미암아 서인은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득세한 이후로 남인과 당쟁을 벌였고, 남인을 꺾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할되어 당쟁을 서로 벌였다.
 
현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이때 남인은 서인 처벌을 엄히 하자는 청남과 느슨하게 하자는 탁남으로 나뉘었다가 영조 때에 다시 남인으로 통합된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여 사색당파를 고루 등용한다고 하였지만, [[사도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의 영향으로 사색당파가 벽파와 시파로 나뉘었다. 이때 노론은 대체로 벽파로서 사도세자에 반대하여 그 죽음을 방조 또는 찬성했으며, 시파는 대체로 노론과 북인을 제외한 나머지로서 사도세자를 지지하여 그 죽음을 반대하였다. [[조선 정조|정조]]의 즉위로 시파가 득세했지만, 정조 말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한 공서파와 그에 대해 느슨하게 대한 신서파로 나뉘었다. 공서파는 [[벽파]]가 주를 이루며, 신서파는 [[시파]]가 주를 이루었으나 동일한 당파이지는 않다.
 
[[조선 순조|순조]]가 즉위한 이후로는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의 벽파가 크게 득세한 가운데 공서파도 세를 얻지만, 시파는 일시적으로 약화되고, 신서파는 몰락한다. 그 뒤 시파인 [[김조순]]의 세도 정치로 붕당은 종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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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평가 ==
당쟁의 폐해를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보던 지적에 대해 [[일본]]의 [[식민사관]]의 영향이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조선 시대에도 당대 지식인들의 당쟁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였다. [[이익 (1681년)|이익]]은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으며, 당쟁의 원인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시데하라 아키라 등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쟁이 가열되었다고 주장하였다<ref> 대한 제국 학정 참여관 시데하라 아키라(幣原 坦), 시학관 오다 쇼고(小田省吾) 그리고 호소이 하지메(細井 肇), 하야시 야스스케(林 泰輔)의 주장이다. {{서적 인용 |저자=신복룡
|제목=한국사 새로 보기
|발행일자날짜=2001-12-20
|판=초판 2쇄
|출판사=도서출판 풀빛
102번째 줄:
|id=ISBN 89-7474-870-3
|페이지=145~151쪽
|꺾쇠표 = 예 }} </ref>. 또한 조선이 [[임진왜란]] 초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한 이유가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들은 붕당이 지배 계층인 양반 사회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정치 집단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붕당은 계급 의식이 깨어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발전된 정치 형태로서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붕당 정치는 외척과 공신의 폐해가 컸던 조선 사회에서 특정 가문이나 공신 집단의 횡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였다. 또한 절대 군주제 하에서도 신하들의 소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중소 지주 계급 전체로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오히려 [[조선 정조|정조]] 이후 붕당 정치가 붕괴하고 특정 가문이 독재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왕조가 휘청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거꾸로 붕당의 정치적 자정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115번째 줄:
|저자=신복룡
|제목=한국사 새로 보기
|발행일자날짜=2001-12-20
|판=초판 2쇄
|출판사=도서출판 풀빛
128번째 줄:
|저자=이태진,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제목=한국사 특강
|발행일자날짜=2006-8-30
|판=초판 28쇄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141번째 줄:
|저자=한영우
|제목=다시찾는 우리 역사
|발행일자날짜=2008-3-30
|판=2판 16쇄
|출판사=경세원
155번째 줄:
 
{{붕당}}
 
[[분류:붕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