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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항석'''(徐恒錫, <small>일본식 이름:</small>松岡恒錫, [[1900년]] [[3월 18일]] ~ [[1985년]] [[9월 27일]]<ref>{{뉴스 인용
|제목=연극인 徐恒錫씨 별세
|작성일자날짜=1985-09-28
|확인일자=2008-06-30
|url=http://gonews.kinds.or.kr/BEFORE_90_IMG/1985/09/28/19850928HKM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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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함경남도]] [[홍원군|홍원]] 출신으로 [[경성부]]에 유학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를 [[1918년]]에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에 [[도쿄 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도쿄]] 유학 시절부터 [[해외문학파]]에 가담하여 연극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도쿄제대 졸업 후 귀국하여 곧바로 [[동아일보]]에 입사하였고, 지방부를 거쳐 학예부장을 맡았다. [[1931년]] [[윤백남]], [[홍해성]] 등과 함께 개최한 연극영화전람회의 성공에 고무되어 그해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신극 운동에 뛰어들었다. 독문학을 전공한 서항석은 해외문학파가 대거 가담한 이 단체에서 주로 독일 희곡을 번역해 소개했으며, 연극평론가로도 활동했다.
 
[[1937년]]에 극예술연구회 제17회 공연으로 [[레프 톨스토이]] 원작의 《부활》을 연출했는데, 순수극을 추구하는 극연의 창립 정신을 잃고 흥행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동아일보 기자직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연극과 영화에 뛰어들었다. 극연이 극연좌로 바뀌고 [[1939년]]에 해산된 뒤로는 주로 악극 연출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공연한 작품으로는 가극 《견우직녀》가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연극인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이사를 맡았고, [[1942년]] [[유치진]]이 쓴 친일 희곡인 〈대추나무〉를 연출해 [[조선총독부]]가 후원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출품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인 국민연극 시기에 한국적인 소재를 각색하여 올리는 악극단 활동에 주로 몰두했기 때문에, 연극 분야에서 친일 인사로 꼽힌 인물 가운데는 친일 행적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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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권영민
|제목=한국현대문학대사전
|발행일자날짜=2004-02-25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출판위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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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발행일자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