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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lang|la|Caligula}})는 [[로마 제국]]의 제3대 [[로마 황제|황제]]([[12년]] [[8월 31일]] - [[41년]] [[1월 24일]], 재위 [[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이다.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이름이 아니라
== 생애 ==
[[파일:Gaius Caesar Caligula.jpg|left|thumb|140px|칼리굴라 상]]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大)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또한,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는 그의 누나였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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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 치세 만 년의 공포 정치 때문에 티베리우스의 인기는 급속히 하락 상태에 놓여있었고, 유서에 의해 티베리우스 게메루스가 공동 상속인으로서 지명되었지만, 원로원이 그것을 무시하여 칼리굴라가 단독 상속인이 되어 황제로 취임했다.
칼리굴라는 처음에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에게 영합하는 정책을 차례대로 풀어나갔으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이 나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그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행동과 생각을 잃어버려 미친듯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검투사 시합을
41년 1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에 근위대장 [[:en:Cassius Chaerea|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 등에 의해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원로원]]이 [[로마 제국|제정]] 대신 [[로마 공화정]]의 부흥을 기획했었지만,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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