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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ign="right" colspan="2" | [[파일:Logo-14.png|10px|]] [[로마 황제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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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lang|la|Nero}})는 [[로마 제국]]의 제5대 [[로마 황제|황제]]([[37년]] [[12월 15일]]~[[68년]] [[6월 9일]], 재위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칭하였다.

흔히 네로 황제라고 하면 정신 이상자이상자나 내지는폭군을 폭군으로 생각하지만연상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의 문화가문화는 크게 발전하였다융성하였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기독교도]]를 대학살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
 
== 생애 ==
[[파일:Château de Versailles, galerie des glaces, buste d'empereur romain 05 (Néron ?).jpg|thumb|left|네로]]
=== 재위 이전 ===
[[37년서력 기원|서기]],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아헤노바르부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소(小)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그의 죽은출생 후,당시 [[로마 아그리피나가제국]]은 숙부인외삼촌인 [[클라우디우스칼리굴라]] 결혼(두집권기였는데, 번째태어난 아내)하자 네로는얼마 클라우디우스의 의붓아들 아버지가 양아들이 되었다사망하였다. 게르마니쿠스의서기 아들이었던[[49년]] 모친인 율리아 [[칼리굴라아그리피나]] 황제는숙부(네로의 그의외종조부)이자 외삼촌이었다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 재위 시기 ===
네로는 [[서력 기원|서기]] [[54년]] 네로는양부 의붓동생을[[클라우디우스]]의 독살을본친아들인 어머니는 항상 해독제를차이의 갖고다녀의붓동생 네로는브리타니쿠스<ref>'''브리타니쿠스'''는 독살을[[클라우디우스]]와 포기그의 하고세번째 물에아내이자 빠트릴첫번째 궁리를황후인 하다 실패하고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어머니는 부하들에게메살리나([[22년]] 칼에 찔려 사망한다 의붓동생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어린- [[브리타니쿠스48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ref>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으며취임하였다. 집권 초기 그는 [[철학]]자요자이자 [[정치가]]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치세 초기 5년은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신]]이 자신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했다."{{출처}}라는 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55년]] 이복동생인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더니독살(이는 그의모친 모친의[[아그리피나]]의 소행이라는 의견도주장도 있다)하였고, [[59년]]에는 [[정치]]적으로정치적으로 간섭해온간섭해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를,모친 [[62년아그리피나]]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65년62년]]에는 [[루키우스아내 안나이우스 세네카|세네카]]를 [[자살]] 명령으로옥타비아를 살해하였다. 더불어서기 [[64년]]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인원인이 되어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소수당시 [[로마 제국]]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뒤집어덮어씌워 씌워[[기독교도]]를 대학살을대학살함으로써 행하여[[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가박해자로 되었다기록되었다.<ref>[[성공회]] [[사제]]이자 신약성서학자인[[신약성서]]학자인 [[박태식]] 신부에 따르면, 네로 황제 당시 화재는 서기 [[64년]]에 9일간 일어났으며,일어났다. 로마 시내 14개 구역중구역 중 10개 10개구역에구역에 일어난 대형 화재였다. 당시 정부의 구호활동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 체제의 안위를 흔들 수 있는 네로 황제 방화설이 수그러들지 않자, 당시 "사악한 [[미신]]", "반(反)[[종교]]적 성향을 가져 미움받는 자",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오명을공격을 쓰고받고 있던있었던 [[기독교인기독교도]]들이 사회혼란을 해결하려는 희생양으로 탄압당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시작해 [[화형]]으로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살해당했다.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ref><ref>네로 황제가 최초의 기독교박해자라는 설명도 있지만, 사도행전에 의하면따르면 네로 황제 이전에도전에도 기독교는 [[헤롯]] 왕실과 [[산헤드린]] 의회에 의해 순교자가 발생하는 탄압을 받았다. 여기서즉, 네로를 "최초의 박해자"라는기독교 말은,박해자라고 로마제국,하는 혹은것은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로최초라는 보는 것이 더 좋다뜻이다.</ref> [[65년]]에는 정치 스승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에는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 죽음 ===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났으며,일어나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국가의 적”으로적"이라는 선고받는다선고를 받았다.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 까지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의 별장에서 자살한다자살하였다.
 
=== 외양 ===
{{인용문2|평균 키에 몸 곳곳에는 점이 있었으며, 악취를 풍겼고,풍겼다. 암갈색의 머릿칼에,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풍모였다.
눈은 유약해보이는유약해 보이는 파란색이었고, 목은 굵었으며굵었다. 배가 나왔고, 다리는 매우 가늘었다.|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12황제 열전》}}
 
 
== 함께 보기 ==
* [[로마 황제 연대표]]
 
==각주==
<references/>
 
{{전임후임
|전임자= [[클라우디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