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9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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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돌아온 레오 9세는 1050년 4월 29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재차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이 시노드에서는 성체 교리를 잘못 가르친 [[투르의 베렝가르]]의 주장을 단죄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같은 해에 그는 살레르모와 시폰토, 베르첼리 등에서 지역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며, 9월에는 모국인 독일을 재차 방문한 후 제3차 예수 부활 대축일 시노드 일정을 맞춰 로마로 돌아갔다. 이 시노드에서는 성직매매로 주교가 된 이들에 의해 사제품을 받은 이들을 재서임해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File:Dingsheim StKilian Leo IX.jpg|thumb|left]]
레오 9세는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에게 서신을 하나 보냈는데,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진짜라고 믿고 그 내용을 인용하였다.<ref>Migne's ''Patrologia Latina'', Vol. 143 (cxliii), Col. 744–769. Also Mansi, ''Sacrorum Conciliorum Nova Amplissima Collectio'', Vol. 19 (xix) Col. 635–656.</ref>
 
1052년 레오 9세는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만나 헝가리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레겐스부르크와 밤베르크, 보름스에서는 교황의 방문을 장엄한 교회 예식으로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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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탈리아 남부는 [[노르만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은 이를 타개하고자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풀리아의 윌리엄]]에 의하면, 동로마 제국은 레오 9세 교황에게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자유를 되찾게 해주고, 아풀리아 지역을 장악해 그곳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저 악랄한 민족이 속히 물러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1053년 제4차 예수 부활 대축일 시노드가 폐막된 후, 레오 9세는 직접 이탈리아인 병사들과 [[슈바벤]]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 군대를 격퇴하러 출병하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노르만족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과 싸우기를 꺼려하여 협상을 요청했으나, 슈바벤 용병들이 그들을 조롱하자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ref>Robert Bartlett, ''The Normans of the South'' BBC TV</ref> 레오 9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었지만, 그의 군대는 1053년 6월 15일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1053년 6월에서 1054년 3월까지 레오 9세는 노르만족에게 항복한 후, 베네벤토에 인질로 잡혀 지냈다. 하지만 포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결국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로마로 돌아왔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1054년 4월 19일에 선종하였다.
 
한편 생전에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진짜라고 믿었던 레오 9세는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에게 서신 하나를 보냈는데, 서신의 많은 부분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인용하는데 할애하였다.<ref>Migne's ''Patrologia Latina'', Vol. 143 (cxliii), Col. 744–769. Also Mansi, ''Sacrorum Conciliorum Nova Amplissima Collectio'', Vol. 19 (xix) Col. 635–656.</ref> 당시 상황에 대해 1913년판 가톨릭 백과사전 제5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편 120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언급한 교황은 레오 9세가 최초였다. 1054년 미카엘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성좌가 하늘과 땅을 모두 아우르는 왕적 사제직을 지니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