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9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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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1048년 교황 다마소 2세가 선종하자 그 해 12월에 보름스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브루노가 다음 교황으로 지명되었다. 황제와 로마의 사절단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정작 브루노 본인은 교회법에 따른 선거를 원했기 때문에, 후임 교황은 로마로 가서 로마 교구의 성직자들과 교구민들의 목소리에 따라 자유롭게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바로 출발한 브루노는 브장송에서 클뤼니의 위그 아빠스를 만났으며,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젊은 수도자 힐데브란트가 이 때 브루노의 여정에 동참하였다. 브루노는 다음해 2월 순례자 차림으로 로마에 도착하여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마침내 로마 교구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교황직을 수락하여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주교좌에 착좌하여 교황이 되었다. 새 교황의 주위에는 젊은 개혁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르미르몽의 위그, [[교황 스테파노 9세|로렌의 프레데리크]], 국무장관 훔베르트, 힐데브란트 등 모두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레오 9세는 가톨릭 개혁에 임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도덕상을 제시하였다. 교황이 된 후 그의 첫 번째 공적 활동은 1049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시노드를 소집한 것이었는데, 이 시노드에서는 ([[차부제]]까지 포함한) 성직자들의 독신을 재차 요구하였다. 또한 시노드 회의장에서 레오 9세는 [[성직매매]]를 반대하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뒤이은 그 해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전역에 대한 사목 방문으로 할애하였는데, 이는 레오 9세의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파비아]]에 소집된 시노드를 주관한 레오 9세는 이후 작센에서 하인리히 3세와 만나 [[쾰른]]과 [[아헨]]까지 그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랭스]]에서 고위 성직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회 쇄신 방안이 합의되었다. [[마인츠]]에서는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성직자들이 대거 모인 교회회의를 소집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보낸 사절단도 참석했다. 마인츠 교회회의에서도 주요 안건은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혼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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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언급한 교황은 레오 9세가 최초였다. 1054년 미카엘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성좌가 하늘과 땅을 모두 아우르는 왕적 사제직을 지니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인용하였다.”
 
레오 9세는 미카엘 총대주교에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위작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진짜로 작성한 것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오직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만이 전체 교회의 최고 수위권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레오 9세는 선종하기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실바칸디다의 훔베르트]] 추기경을 교황 특사 자격으로 파견하였다.<ref>Brett Edward Whalen, ''Dominion of God: Christendom and Apocalypse in the Middle Ag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24.</ref> 훔베르트 추기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전달함으로써 상황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당시 그의 행동은 이미 교황이 선종한 후에 독단적으로 행동한 일이었기 때문에 교회법적으로 무효였지만, 이에 반발한 미카엘 총대주교가 훔베르트 추기경과 그의 수행원들을 파문하는 교서를 내는 것으로 맞대응함으로써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 사이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교황의 수기 기록자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트에 의하면 교황은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원하여 교황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교황의 주위에는 젊은 개혁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르미르몽의 위그, [[교황 스테파노 9세|로렌의 프레데리크]], 국무장관 훔베르트, [[교황 그레고리오 7세|힐데브란트]] 등 모두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교황은 6개월 이상 로마에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헝가리]] 등지를 순회하면서 로마와 먼 지방인들에게 교황의 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로마, [[파비아]], [[랭스]], [[바리 (이탈리아)|바리]], [[마인츠]] 등에서 12번의 지방 회의를 소집하고 평신도 서임과 성직매매 그리고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교황은 수도원의 재산을 보호하고 [[성인 (종교)|성인]]들의 유해를 공경하게 하였으며 베르첼리에서 성체 교리를 잘못 가르친 투르의 베렌가리우스를 단죄하였다.
 
레오 9세는 하인리히 3세와 조화를 이루었으나 이탈리아 안에서 황제의 총대리격에 불과하였다. 교황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자극을 받아 이탈리아 남부를 침범하는 [[노르만족]]을 무력으로 막아 줄 것을 [[비잔티움 제국]]에게 요청하였으나 황실의 반대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의 반감만 사게 되었다. 교황은 [[1053년]] [[6월 18일]] 치비타테에서 노르만족과 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하고 [[바리 (이탈리아)|바리]] 근처에서 감금되었다. 이에 교황은 [[1054년]] 훔베르트를 비잔티움 제국에 보내어 비잔티움 제국과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로마 교황청]]이 삼자 동맹을 맺어 노르만족에 대항하자는 제의를 전하였으나 훔베르트와 케룰라리우스의 무책임한 결정들로 인해 오히려 관계가 더 악화되고 말았다. 교황은 패배로 지친 데다 [[말라리아]]에 걸린 몸을 이끌고 로마로 귀환하여 선종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