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띄어쓰기
4번째 줄:
== 배경 ==
{{본문|제1차 아편 전쟁}}
근현대사에서 최초의 '더러운 전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1차 아편 전쟁]] 에서 패한 청나라는 당사자인 영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을 수밖에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 기영(耆英), 이리포(伊里布)가 당시 난징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에서 영국의 전권대사 포틴저와 맺은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내용 ==
17번째 줄:
 
== 결과 및 영향 ==
난징조약으로 인해 홍콩 섬을 할양하고, 중국은 문호(門戶)를 강제로 개방할 수밖에수 밖에 없었고, [[톈진]], [[상하이]]에 [[조계]]를 허용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서양 열강은 중국에 대한 [[조계|조계제도]]를 성립시켜 [[1844년]]에 미국도 [[왕샤조약]](望厦條約)을, 프랑스도 [[황푸조약]]을 각각 체결했다.
 
영국의 이러한 오만한 정책과 난징조약을 개정 요구를 하면서까지 더 거센 개방정책은 필수적으로 1857년 [[제2차 아편 전쟁]]을 불러올 수밖에수 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은 1856년 10월 8일 [[애로호 사건]]을 유발하여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하여 맺은 [[톈진 조약]]은 중국의 [[조계지]]를 반식민지화시켜, 빈사 상태에 빠진 중국을 완전히 침묵시킨다.
 
이러한 서양 열강들의 작태를 본 일본도 중국이 약체화 되어있는 틈을 노려 1876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