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환 (1897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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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3-11-25}}
김봉환은 북경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접촉, 공산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승려이자 무정부주의자인 [[김성숙 (1894년1898년)|운암 김성숙]]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김성숙 (1894년1898년)|운암 김성숙]]은 남쪽으로, 김봉환은 북만주로 갔다. [[1929년]] 당시 북만주 [[김좌진]]측 민족진영의 활동무대는 해림이었다.<ref>해림에서 남쪽으로 6십리쯤 되는 곳에 영고탑이 있었고, 영고탑 남쪽 7십리 거리에는 발해국의 수도였던 동경성이며, 동경성과 영고탑 사이에서 목단 강을 사이에 두고 10리쯤에 있는 황지둔촌은 [[고려공산당]]의 만주지역 근거지이자 무장투쟁 본부였다.</ref> 처음 김봉환은 해림에 근거지를 둔 김좌진의 동지들을 포섭하고 공산주의자 몇명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김종진과 이응규가 있었기에 김봉환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김봉환은 일본 제국주의를 공박하는 글을 종종 발표했다. 그리고 강경애라는 여류문인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29년 겨울, 하얼빈으로 갔다가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만주국에 파견된 일본 영사관 경찰서 경부 송도(松島)는 해림에 있는 동거녀 강경애를 꾀어내 하얼빈 경사관 감옥에 감금된 김봉환과 만나게 됐다. 김봉환은 일부 자료를 넘겨준 뒤 즉시 석방되어 애인과 함께 해림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6, 7년형이 선고되었다가 갑자기 일본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난 김봉환은 주위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됐다. 또한 그가 [[한족총연합회]]를 장악하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것 때문에 시선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