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이오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74번째 줄:
=== 남북 전쟁 시기 ===
[[File:The Underground Railroad by Charles T. Webber, 1893.jpg|thumb|left|오하이오의 [[지하 철도]]는 도망친 노예들이 [[캐나다]]로 달아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남북 전쟁]](1861~65)이 일어나가 전,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오하이오의 주민들이 노예제도에 강한 의문을 품었다. 많은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오하이오에 살았다. 그들은 도망친 노예들이 오하이오 강을 건너 [[캐나다]]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친남부적인 오하이오의 주민들은 주로 오하이오주의 남부에 살았다. [[1862년]] 오하이오주의 남부 [[데이턴 (오하이오 주)|데이턴]]의 클레멘트 L. 밸런디엄이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대통령 행정부의 노예제도폐지를 반대하며 평화민주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밸런디엄과 뜻을 함께한 친남부적인 주민들을 "코퍼헤드"라고 불렀다.
 
[[율리시스 S. 그랜트]]와 [[윌리엄 T. 셔먼]]을 포함한 많은 북군의 사령관들이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북군 중에 약 345,000명의 남성들이 오하이오주 출신이었다. [[1863년]] "모건즈 라이더"라 불리는 남군의 기병대가 오하이오로 와서 남북전쟁 중 가장 북쪽에서 일어난 전투가 일어났다. 존 헌트 모건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컬럼비아나 카운티에서 사로 잡혔다. 모건 장군은 후에 탈출하여 남부로 도망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