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소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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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쇼니 가문]](少弐氏)과 [[시마즈 가문]](島津氏)과 더불어 [[막부]]의 [[고케닌]](御家人)으로서 권세를 누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는 [[오우치 가문]](大内氏)의 규슈 진출에 대항하여 쇼니 가문과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오우치 가문과 [[모리 가문]](毛利氏)을 비롯한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와 토호 등의 세력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센고쿠 시대의 북규슈 동부를 평정한 것이 바로 '''오토모 소린'''이다. 아버지는 오토모 가문 제 20대 당주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이고, 어머니는 일단 [[오우키 요시오키]](大内義興)의 딸이라고 하나, 요시아키의 차남으로 [[스오노쿠니|스오]] 오우치 가문의 가독을 이은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와는 이복형제 간이라는 말도 있어, 이설로 [[구게]](公家) 출신의 딸 또는 가신의 딸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설에 따르면 생모는 [[아소 고레노리]](阿蘇惟憲)의 딸이라고도 한다.

동생으로 오우치 요시나가, [[오토모 시오이치마루]](大友塩市丸), [[오토모 지카사다|지카사다]](大友親貞)<ref>지카사다에 대해서는 조카라는 말도 있다.</ref>등이 있다. 자식은 [[오토모 요시무네|요시무네]](大友義統), [[오토모 지카이에|지카이에]](大友親家), [[오토모 지카모리|지카모리]](大友親盛) 등.
 
해외 무역에 따른 경제력과 뛰어난 무장진, 교묘한 외교술<ref>[[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와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대패한 것으로 볼 때, 소린은 전략가로서는 이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략에 대해서는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조차 쥐었다 폈다 할 정도의 수완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유명무실해진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막부에 막대한 헌상금을 바쳐 슈고직(守護職)과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규슈를 통치하는 막부의 역직)직을 얻어내어, 규슈 지배의 정당성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덴쇼 9년(1581년)에는 당시의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우의를 다져서 그것을 등에 업고 [[시마즈 요시히사]])와 일시적으로 화의를 맺는 등, 외교 수완은 특히 뛰어났다.</ref><ref>발급 문서가 대단히 많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문서만으로도 1000통이 넘고, 문서의 종류 또한 가신단의 통솔과 중앙정권과의 연통은 물론, 심지어 외국 여러나라와의 통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어서 이 역시 소린이 외교에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었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ref>등으로 오토모 가문의 세력판도를 크게 넓혔다.
 
당초는 [[선종 (불교)|선종]]에 귀의했으나, 후에 [[기독교]]에 큰 관심을 가져, 결국 스스로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 다이묘로서도 유명하다. 한때 규슈 6개국을 평정한 규슈 최강의 다이묘이기도 했다. 그러나 「크리스천 왕국(キリシタン王国)」건설의 꿈을 목전에 두고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영지 [[휴가노쿠니|휴가]](日向)를 침공하였으나 대패하여([[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 만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수하의 일개 다이묘로서의 처지를 감수하며 [[분고노쿠니|분고]] 1국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까지 쇠퇴하였다.
 
== 인물・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