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오호 십육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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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 말기부터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흉노]](匈奴)와 [[선비족]](鮮卑族) 등 주변 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특히 흉노의 분열 이후 [[남흉노]]가 대거 [[산시 성 (산서성)|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정착하여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번병(番兵)의 역할을 하였다. 3세기 말, [[팔왕의 난]] 이 일어나 [[서진]](西晉)이 혼란에 빠지고, 남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은 서진 황족의 권력쟁탈에 용병으로 개입하면서 독립을 모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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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 (전조)|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楚王)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서진 회제|회제]](懷帝)를 사로잡았다.('''영가(永嘉)의 난''') [[장안]](長安)에서 [[서진 민제|민제]](愍帝)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도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유총의 치세에 한은 화북 일대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유요는 장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옹주(雍州 : [[산시 성 (섬서성)|산시 성]](陝西省) 중남부)·진주(秦州 : [[간쑤 성]](甘肅省) 동부)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석륵은 하북(河北)과 병주 북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유총의 치세에 유요와 석륵이 점령한 지방은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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