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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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음력 4월 28일]] [[조선]]의 맹장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전라감사 [[이광 (1541년)|이광]] 4만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 2만,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1만 5천
도합 8만 병마兵馬가 용인에서 집결하였다.<ref>기재사초</ref> <ref> 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ref><ref>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ref><ref>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11번째기사</ref>, 이광 등이 [[전라도]] 에서 4만을 이끌고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2만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한다. <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4번째기사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ref>[[이광 (1541년)|이광]]을 맹주로 삼은 뒤 남도근왕군이라 칭했다. 경상도 김수에겐 군사가 수백 혹은 없었다. <ref>상촌집 ,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4번째기사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ref>
총합 7~8만여 명인데 <ref>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 호성감 이주를 인견하고 고경명의 사망, 승군의 활약 등을 묻다</ref> <ref>기재사초</ref> <ref>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ref>그들은 10만이라 호칭했다. <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24번째기사 이광이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다</ref> 이광이 처음 출발할때 군사수도 10만이었다. <ref>기재사초</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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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의병은 신익이 여러차례 진을 옮기며 도망치고 백광언(白光彦)·이지시(李之詩)는 절도를 그르쳤기때문에 싸움에서 졌다고 말했다. <ref>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ref>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이 1만 5천 군사 중 8천의 근왕병만으로 이광,곽영과 함께 가고 나머지는 적이 오는 길목에 매복시키려했으나 <ref>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11번째기사 </ref> 어째서인지 당시 사관의 기록 기재사초 그리고 선조실록은 충청도용인에 군사주둔한 1만 5천이시간의 이광,곽영과삼도연합군이 함께8만의 용인에군세였다고하며 주둔해목격자의 8만의증언까지 군세였다고 적고있다적혀있다.
윤선각은 1만 5천 몽땅 데리고 이광,곽영과 함께 용인에 도착한거로 보는게 맞다. <ref> 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ref><ref>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ref>
 
당시 사관의 기록인 기재사초에도 "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향하였다."라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