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 생애 ==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73년]]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십구사략]]>을 주해하기도 했으며, [[1587년]] [[평안도]] [[관찰사]]에서 면직되었으나 [[경상도]] 관찰사로 복직되었다. [[1591년]] [[정철]]의 재판 문제로 [[남인]]과 [[북인]]이 갈라지자 [[남인]]이 되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감사]]로 적들을 막지 못해 [[진주]]에 머물다가 [[동래성 전투|동래성]]이 함락되자 [[밀양]], [[함안]]을 거쳐 [[거창]]으로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 일로 크게 비난을 받았고 [[이광 (1541년)|이광]],[[곽영]], [[윤선각(윤국형)]] 등이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 8만을 일으켰을 때 <ref> <ref>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6일(계축) 1번째기사 호성감 이주를 인견하고 고경명의 사망, 승군의 활약 등을 묻다</ref><ref>기재사초</ref><ref>선조 140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8월 28일(계사) 2번째기사 </ref></ref> 겨우 1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했고 [[용인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영남초유사 [[김성일 (학자)|김성일]]의 질책을 받았다. 또한 [[곽재우]] 등 의병장과도 갈등이 심했다. [[1592년]]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여러 벼슬을 거쳐 중추부영사에 이르렀으나 [[1613년]] 손자 [[김비]]가 옥사할 때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