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스톡 페스티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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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모습 ==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Music and Art Fair)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뉴욕 주]] 북부 베델 근처 화이트 레이크의 한 농장에서 '3 Days of Peace & Music'이라는 구호 아래 음악 페스티벌이 열렸다. 입구를 부수고 들어간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3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농장으로 몰려갔다고 전해진다.
 
우드스톡은 음향 시설이 형편없었고 음식과 물과 화장실도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폭우가 쏟아져 농장은 거대한 진흙뻘 같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도 우드스톡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미국의 히피문화, 즉 반문화 공동체의 열기를 누그러뜨리진 못했다. 부족한 샤워 시설과 폭우는 천진난만하게 물장구를 칠 물 웅덩이로 대체되었으며 진흙 뻘은 히피들의 낭만적인 놀이터가 되었다. 사랑과 평화의 모토를 단 그곳은 '우드스톡네이션'으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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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자 ====
30만명이라는 미국인들과 함께 히피 공동체의 '지상 낙원'을 꾸민 출연자는 [[지미 헨드릭스]], 컨트리 조 & 더 피시(Country Joe & the Fish), 후,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조 코커]](Joe Cocker), [[산타나]](Santana), [[텐 이어스 애프터]](Ten Years After),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 [[존 바에즈]](Joan Baez), 알로 거스리(Arlo Guthrie),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 CCR, 더 밴드(The Band), [[그레이트풀 데드]], [[ 제퍼슨 에어플레인]], [[라비 샹카르]] 등이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국가를 조롱하듯 연주해 환호를 받았고 [[재니스 조플린]] 또한 뜨거운 열창으로 관객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크로즈비 스틸스 내시와 닐 영의 멋드러진 화음과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의 시원한 노래도 들을 수 있었고 흑인 포크가수 [[리치 헤이븐스]]의 두터운 저항의 목소리도 울려 퍼졌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그레이트풀 데드의 초기 나른한 사이키곡들과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초기 히트곡도 들을 수 있다. [[멜라니]]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에서 온 텐 이어스 애프터와 더 후는 이 공연 후에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다. 조 코커가 완전히 자기만의 식으로 부른 [[비틀스]]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는 후에 3장짜리 LP로 발매된 공연 실황 앨범(CD로는 2장)의 백미로 평가된다. 이 곡은 관중과 같이 호흡하며 우드스톡의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모든 장르의 록음악이 총집결한 한바탕의 잔치였다.
 
==== 1969년의 사회적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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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경제적인 영향 ==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거대한 규모의 페스티벌의 상업적 성공의 전례가 되었다. 뮤지션의 높은 개런티(후와 그레이트풀 데드는 현금으로 1만 5천 달러를 요구했다)와 입구를 부수고 무임승차한 청중으로 인해 페스티벌 자체는 130만 달러의 큰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개봉 첫 5주 동안만 2천 5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Woodstock]의 3장짜리 사운드트랙과 비디오 출시가 이어져 결과적으로 우드스탁은 총 5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사회적인 영향 ==
우드스탁에서 미국 국가 [Star Spangled the Banner]를 조롱하던 지미 헨드릭스의 호기롭던 연주는 알타몬트(Altamont)의 사건으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1969년 전미 투어를 마친 롤링 스톤스는 팬들을 위한 무료 콘서트를 열었는데, 공연 하루 전에 장소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30만명이 샌프란시스코 남동쪽 알타몬트 고속도로 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롤링 스톤스의 공연 막바지에, 경비대로 고용된 오토바이족 헬스 앤젤스(Hell's Angels)가 한 흑인 청년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광경은 투어 필름에도 담겼다. 우드스탁에서도 사망자가 나왔지만 낭만주의적 청년 문화의 화려함에 묻혀 잊혀진 바 있다. 그러나 알타몬트의 사건은 곧 이슈화되었고, 언론과 기성 세대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몬터레이 이후 여러 페스티벌에서 약물과 소요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해왔지만, 알타몬트의 비극은 1960년대, 히피 반문화의 끝을 보여준 너무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록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었다.
 
몬터레이와 우드스탁은 청년들을 하나의 문화 블록으로 형성시켰고, 1960년대의 낙관주의와 청년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우드스탁은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 혹은 향수의 대상이 되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1969년 미국,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끓어오르던 시기의 미국에서 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1960년대 카운터컬처와 반전운동을 상징하는, 20세기의 가장 큰 문화적 사건이었다.
 
== 우드스탁을 기억하며, 테이킹 우드스탁 ==
우드스탁을 회고하는 책과 영화는 그간 많았는데, 엘리엇 타이버의 회고록인 [[테이킹 우드스탁]]은 한때 무산 위기에 처했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어떻게 무사히 열려 전설로 남게 되었는지에 관한 폭소와 눈물 가득한 뒷이야기이다.
 
엘리엇 타이버는 누구인가? 우드스탁에 관한 자료는 엄청나게 많지만 거기서 그의 이름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드스탁을 개최한 4인방도 아니고, 자신의 농장을 콘서트 장소로 제공한 통 큰 농장주도 아니고, 페스티벌을 수놓았던 쟁쟁한 뮤지션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우드스탁 호는 좌초했을지도 모른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우드스탁을 가능하게 했던 한 청년, 그러나 그 자신이야말로 우드스탁으로 인해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청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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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음악팬들에게 가장 뜨거운 이슈는 `우드스탁 코리아의 개최 여부`였다. 한 관계자가 웹상에 개최 소식을 올리면서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그 진위 여부를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공연이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는 어찌 될지알 수 없다는, 그간 국내 음악팬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은 이런 공방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나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개최자 중 하나인 아티 콘펠드가 자신의 트위터에 인사말을 올리고 공연을 기획한 국내 기획사가 기자회견을 예고하면서 일단 우드스탁 코리아의 역사적인 개최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국판 우드스탁'이 현실화될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 관계자는 “8월 6~8일 경기도 파주시 평화누리공원에서 국내외 음악가들이 참가하는 대형 페스티벌‘우드스탁 2010’을 개최하는 것을 현재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밴드 라인업도 현재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오픈된 우드스탁 홈페이지에는 한국에서 ‘우드스탁 2010’이 8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개최된다는 간단한 공지가 올라왔다.‘With the Father of Woodstock’이라는 문구가 함께 올라와, 우드스탁 페스티벌 최초 기획자인 아티 콘펠드(Artie Kornfeld)가 ‘우드스탁 2010’기획에도 참여함을 암시했다.
특히, 아티 콘펠트는 지난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8월 한국 우드스탁에서 봅시다(see y ou at woodstock korea artie kornfeld august)”라는 글을 올린 바 있어서 더욱 관심이 집중된바 있다. <ref name="시작">{{뉴스 인용
|제목=2010 夏, 초대형 록페스티벌이 몰려온다
|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10&no=148581
|출판사=매일경제
|저자=이현우
|작성일자날짜=2010-03-24
|확인일자=2010-03-24
}}</ref>
80번째 줄:
|출판사=경향닷컴
|저자=손봉석
|작성일자날짜=2010-06-03
|확인일자=2010-06-03
}}</ref>
90번째 줄:
|출판사=중앙일보
|저자=고경석
|작성일자날짜=2010-07-30
|확인일자=2010-07-30
}},
98번째 줄:
|출판사=경향신문
|저자=손봉석
|작성일자날짜=2010-07-30
|확인일자=2010-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