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해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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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전투==
[[노르망디 상륙]]후 [[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재빠르게 탈환하기 시작하자 [[독일 국방군|독일군]]은 고립되거나 철수를 시작하며 모든 친독일계 경찰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몇몇 반독일 시위가 일어났고, 무장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활발히 일어났다. 사기가 떨어진 [[독일 국방군|독일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지역적인 중앙적 지시 없이 경찰서, 마을 회관, 공공기관, 신문사, 그리고 드 빌 호텔에서 활동 중이던 [[프랑스 국내군]]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약 20,000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파리에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로 표지판을 파괴하고, 독일 병사들의 자동차 바퀴를 구멍냈으며 통신선을 두절했고, 정유소를 폭발시켰으며, 고립된 독일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부적절하게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전쟁을 하기를 두려워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스웨덴의 [[라울 노들링에게노들링]]에게 독일군 담당자와 파리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리츠와의콜리츠]]와의 협상을 원했다. 8월 19일 이들은 협상을 계속 이어갔다. 레지스탕스군은 서열이 모호했고, 콜리츠는 파리의 일부분을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넘기기로 협의했다. 레지스탕스 대원은 특정 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하는 것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이었고 독일군과 레지스탕스 대원 둘다 그들의 구역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은 8월 24일에 발족한후 [[베허마흐트|독일군]]은 대부분 파리에
철수하거나 전투를 중지하였으며 다음날 8월 25일경 진격하던 [[연합군]]은 파리로 입성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