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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진나라에 항거한 초나라 명장 [[항연]]의 손자로 조부가 죽고 [[초 (춘추전국)|초나라]]가 멸망하자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회계의 오중으로 숨어, 숙부 항량의 손에 자랐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나고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수 은통을 참살한 뒤, 8천여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주변 세력을 병합하였다.
후에 양부나 다름없던 숙부 항량이 진의 장한의 계책에 죽자 격분하여 스스로 상장군이라 칭한 뒤 [[하북]](河北)에서 [[장한]](章邯)을 항복시키고 도처에서 진나라군을 무찔러 진의 세력을 소탕하였다. 허나 이 기간동안 전한 고조 [[유방]](劉邦)이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함양왕이 되려하자 서둘러 함곡관을 향해 진군하였다. 유방이 함곡관에서 자신을 막고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유방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방이 지레 겁을 먹어 함곡관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에 항우는 유방을 홍문에 불려내 범증의 말처럼 죽이려 하였으나, 장량의 계책에 빠져 결국 죽이지 못하고 유방의 항복을 받은 후 유방을 풀어줬다. 이후 항우는 함양성에 입궁하여 [[진 삼세황제|진왕 자영]](秦王 子嬰)을 죽이고 도성 함양에 아방궁과 일부 건물을 불사른 뒤에 서초 패왕 즉위(국사로써 즉위한것이라서 정식으로 왕,황제가 된 것은
패제 항우가 팽성에 천도한뒤, 당시 천하의 중심이였던 함양성은 고작 삼진의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등 전 진나라 장수들이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에 소하의 천거로 파초대원수(破礎大元帥)에 임명된 [[한신]](韓信)은 삼진을 속전속결로 격파하고 패제가 미처 원군을 보내기도전에 함양성을 점령한다.
패제는 패제는 제나라의 반란을 단숨에 제압하지 못하였고, 이에 한신과 장량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진한 고조제에 의해 수도 팽성을 빼앗겼다. 이에 패제는 종리매등에게 주력군을 내려 제나라의 반란을 제압하게 하고 자신은 단 3만의 정예부대로 팽성을 수복하러 간다. 이에
이후에도 자신의 특출난 장수로써의 실력과 참모 [[범증]](范增)의 계책을 써 고조 유방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 하였으나, 고조에게 투항한 [[진평]](陳平)이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아 결국 항우는 범증을 내쳤고, 이에 상심한 범증이 고향으로 내려간 후 종기에 걸려 죽고 말았다(이를 중국 제 2대 애탄이라 한다). 그 후에도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선 승리를 하는 등 맹장의 기세를 보였으나, 항우가 유방과 대치하는 틈을 타 하북을 평정한 파초대원수(破礎大元帥) 제번 제후(濟藩 諸候) 한신까지 합세하자, 결국 [[해하]](垓下)에서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군의 포위망에 갇혀있게 되었고 한나라군은 장량의 계책으로 초군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항복하게 하기 위해 초나라 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하게 하였다. 이 계책으로 인해 종리매와 계포등 항우의 오른팔이라도 할 수있는 장수들 마저 탈영했으며, 특히 참모이자 자신의 숙부 [[항백]](項伯)마저 유방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이를 빗대어 위기에 몰린 사람에게 이 계책에서 유래 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를 만들어 불렀다.
항우는 허탈하고 상심하여 수백명밖에 남지않은 자신의 진영을 둘러보았고, 이에 끝까지 자신과 함께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고향인 [[강남]]으로 향할 수있는 [[오강]](烏江)까지 자신이 그들을 이끌도록 약속한다. 일단 진영을 에워쌌던 100만에 달하는 한군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자 남은 것은 단지 28기 뿐이였다.
항우는 그 26기의 강남자제와 사공의 배를 타서 강남으로 도망가 훗날을 기약하자는 권유를 거부하였는데, 처음 [[회계]]에서 거병할때 자신을 따른 8천의 강동자제들을 모두 잃고 이제 오직 26기만 살아있으니 강동의 백성들이 용서하여도 자기 자신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가 강남으로 떠난것을 보고 항우는 마지막에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워 수백명을 죽이고 자신 역시 많은 [[부상 (몸)|부상]]을 입었다. 항우는 옛 부하 여마동(呂馬童)을 보고는 “유방이 내 [[목]]에 천 금과 만 호를 걸었다는데 그 은혜를 베풀겠노라!”하고는 자살하였다. 왕예(王翳)가 목을 취하자 남은 기병들이 서로 짓밟으며 그 시신을
항우는 진나라와의 거록 전투, 유방과의 수수 전투를 통해 역대급의 무예와 통솔을 자랑하는
== 해하가(垓下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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