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동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
1번째 줄:
{{인물 정보
|이름 = 염동진
|그림 = 염동진.JPG|
|그림설명 = 염동진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34년]] 낙양군관학교 시절
|출생일 = {{국기나라|대한제국}} [[
|출생지 =
|사망지 =
|사망일 = 미상
|사망원인 =
|거주지 =
|국적 =
|별명 = 본명 염응택(廉應澤), 해방 후 별칭 맹인 장군
|학력 = [[선린상업학교]],
|직업 = [[독립운동가]]
|종교 =
|배우자 =
|자녀 =
|부모 =
|친척 =
|서명 =
|웹사이트=
}}
'''염동진'''(廉東振, 본명 : 염응택(廉應澤), [[1902년]]
== 생애 ==
그의 유년기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으며 [[1931년]] 3월 22살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34년]] [[2월 25일]]에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 독립운동 ===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남경에서 활동하였다. 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민족혁명당 간부당원 동정보고에 의하면 염동진은 어떠한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35년]] 겨울 [[민족혁명당]]조직에 반대하여 화북방면으로 간 것만 나올 뿐 이후 자료는 알 수 없다. 염동진의 생질 김종진에 의하면 파벌싸움에 실망하여 동포들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하여 남경에서 만주 화북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1936년]] 2월 산성진에서 [[일본 관동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고문으로 눈이 멀어졌다고 한다. 이후 염동진은 관동군에 협력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료는 없다고 한다. 생질 김종진은 독립운동가들과 관련은 없었다고 말한다. [[1940년]]경에 [[관동군]]에서 풀려난 31살 염동진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는 [[관동군]]에 협력한 것이 그의 약점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관동군]]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료가 없어 그가 친일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43년]] [[평양]]에서 대동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C%EB%8A%94_%EB%A7%90%ED%95%A0_%EC%88%98_%EC%9E%88%EB%8B%A4 이제는말할수있다 비밀결사 백의사]</ref>
=== 해방정국 ===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한 후 약탈과 부녀자 겁탈 등 만행에 반발하여 [[현준혁]]을 암살하였다. 이후 [[소련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월남하였다.
서울로 월남한 염동진은 [[낙원동 (서울)|낙원동]]에 아지트를 두었고 대동단을 백의민족이라는 뜻인 [[백의사]]로 개칭했다. 효자동, 궁정동 등 서울 여러 곳에 아지트를 확장하고 단원들을 포섭하며 단원들도 서로 잘 알아보지 못하는 [[비밀결사]]로 맹렬한 반공주의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김일성]] 등 요인 암살을 시도하였고 백의사 단원들을 경찰계, 국방 경비대, 노동계 등에도 들여보내 반공운동을 하게 하였다.
[[1946년]] [[2월 15일]]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을 [[김두한]]과 단원을 통해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박헌영]]을 납치시도 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1947년]] [[7월]]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사용한 권총을 제공했다.
그는 좌익 노동운동에 대해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1947년]]에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염동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추어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남한에서 이런 우스꽝스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서울(G-2) 본부와 목단 지역에 사령부를 두어 1만 5천명의 사단 병력으로 구성되는 백의군 창설 계획을 세워 백의군을 창설하고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만주에는 이미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태로 실현은 하지 못했다.
[[웨더마이어]] 중장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염동진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을 두는 [[파시스트]]적인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라고 적혀있다. 실리 소령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다. "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하였다. 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라고 적혀 있다.
=== 정부수립과 만년 ===
[[1948년]]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몇 명만 제외하고 여기저기 흩어졌다. 한편, 실리보고서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을 [[백범 김구]]의 암살배후로 지목하고 있으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 백찬옥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 또한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백범 김구]] 연구를 한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점차 [[조현병]]을 앓았고, [[1950년]] [[한국 전쟁]] 발발후 피난가기를 거부하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조선 인민군]]에게 불잡혔으나 생사여부는 알 수 없다.
== 인물평 ==
미국의 조지 실리 [[육군]] [[소령]]은 "분명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이란 평을 내렸고, "혹은 일반적으로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실리 소령은 보고서에서 그에 대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나 미국인과 인터뷰할 때는 통역을 활용해 신분을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의 소유자”라고 회고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4035/1 국사편찬위 자료공개 "백범암살 배후는 미국"]</ref>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염동진을 두고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라며 하루하루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만 생각한 냉혈인간이라고 평가했다. 해방정국 혼돈 속에 염동진은 홀연히 사라졌지만, 그의 백색테러는 백주의 [[호열자]]처럼 퍼져나갔다고 덧붙였다.<ref>고은, 《[[만인보]]》 제20권 중 〈염동진〉, 창작과비평사, “1945년 겨울 서울 종로 2가에 염동진이 나타났다 아니 스며들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동지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몰랐다. 수군거리기를 중국 북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한다. 수군거리기를 가족 전부가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 한다.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 잠자리에서도 검은 안경 벗지 않는 장님 잠자리에서도 권총을 챙겼다. 청년 유진산은 머리였고 청년 김두한은 주먹이었다. 모자 벗은 머리에서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냉혈인간 그의 말은 칼끝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그의 하루하루는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홀연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ref>
== 주석 ==
<references/>
==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46100000&pagesize=15&pagenum=4&cornerFlag=0&ContentTypeID=1 비밀결사 - 백의사] [[문화방송]] 2002년 1월 20일 방송
* [[도진순]]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1.html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신동아]] 2001년 10월 1일 (통권 505 호) 302 ~ 314 쪽 작성
*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한국사연구총서 1)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분류:1902년 태어남]]
[[분류:몰년 미상]]
[[분류:
[[분류:고문 피해자]]
[[분류:반공주의자]]
[[분류:한국의
[[분류:파시스트]]
[[분류:
[[분류:
[[분류:의문사한 사람]]
[[분류:파주 염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