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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중립성}}
{{인물 정보
|이름 = 염동진
|그림 = 염동진.JPG|
|그림설명 = 염동진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34년]] 낙양군관학교 시절 사진이다.사진
|출생일 = {{국기나라|대한제국}} [[1902년1912년]] [[2월 14일]]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사망지 = 미상
|사망일 = 미상
|사망일 =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게 납북되었으나 생사불명
|사망원인 = 불명미상
|거주지 =
|거주지 = {{국기나라|대한제국}}→{{국기나라|중화민국}}→{{국기나라|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문산리 54번지<ref name="min1">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824</ref>
|국적 = {{국기나라|대한제국}}, {{국기나라|중화민국}}, {{국기나라|대한민국}}
|별명 = 본명 염응택(廉應澤), 해방 후 별칭 맹인 장군
|학력 = [[선린상업학교]], [[낙양군관학교]]
|직업 = [[독립운동가]], 정치인, [[사회운동|청년운동가]], [[군인]]
|종교 = 미상
|배우자 =
|자녀 = 미상
|부모 =
|부모 = 아버지 염도열(廉道悅), 어머니 이름 미상
|친척 = 형 2명, 생질 김종진(생질)
|서명 =
|웹사이트=
}}
'''염동진'''(廉東振, 본명 : 염응택(廉應澤), [[1902년]]<ref>그의 출생년도는 1909년생 설도 있다.</ref> [[2월 14일]] ~ [[1950년]](?) )은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며 [[한국의 군정기|해방정국]]의 비밀 테러 결사단체비밀결사 [[백의사]]의 총사령관이다.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종사하면서 [[중국 국민당]] 정권과 [[장제스]]의 친위 테러조직인 [[남의사]]를 본따 [[백의사]](白衣社)를 조직했다총사령이다.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으나 후에 [[김구]]의 측근이 되었다. [[김구]]와는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였으며 [[국민혁명군|중국]]군으로 복무했고,<ref name="go1">[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5/1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미군정보요원"] 동아일보 2001년 09월 04일자</ref> 되어 중국 공산당군 또는 해방후 북한 공산당에 의해 고문당해 장님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백의사]]를 조직, 김구의 노선을 지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활동했고, 귀국 후 [[소련]] 군정에 반발하여 월남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휴에는 [[김구]]와 함께 [[이승만]] 정권을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ref name="qudeta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1.html</ref> 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실패하고 [[조선인민군]]에 피랍, 월북되었다. 월북 이후의 행방은 미상이다. 본명은 '''염응택'''이며, 가명은 요춘택, 백의사 단원들 중에는 '''동진'''을 호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본관은 [[파주 염씨|파주]]이다.
 
== 생애 ==
그의 유년기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으며 [[1931년]] 3월 22살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34년]] [[2월 25일]]에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 생애 초기 ===
염동진은 [[1902년]] 또는 [[1909년]] [[2월 14일]] [[평안남도]]에서 염도열(廉道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염응택'''(廉應澤)이다. 출생년대는 불확실하여 [[1902년]]생 설과 [[1909년]]생 설이 있었다.
 
그의 유년기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으며{{출처}} [[1931년]] 3월 22살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34년]] [[2월 25일]]에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 독립운동 ===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남경에서 활동하였다. 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민족혁명당 간부당원 동정보고에 의하면 염동진은 어떠한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35년]] 겨울 [[민족혁명당]]조직에 반대하여 화북방면으로 간 것만 나올 뿐 이후 자료는 알 수 없다. 염동진의 생질 김종진에 의하면 파벌싸움에 실망하여 동포들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하여 남경에서 만주 화북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 망명과 수학 ====
{{참고|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 광복군|낙양군관학교}}
 
[[1936년]] 2월 산성진에서 [[일본 관동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고문으로 눈이 멀어졌다고 한다. 이후 염동진은 관동군에 협력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료는 없다고 한다. 생질 김종진은 독립운동가들과 관련은 없었다고 말한다. [[1940년]]경에 [[관동군]]에서 풀려난 31살 염동진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는 [[관동군]]에 협력한 것이 그의 약점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관동군]]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료가 없어 그가 친일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1934년]] [[2월 25일]]에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반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43년]] [[평양]]에서 대동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C%EB%8A%94_%EB%A7%90%ED%95%A0_%EC%88%98_%EC%9E%88%EB%8B%A4 이제는말할수있다 비밀결사 백의사]</ref>
[[미국]] 정보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낙양군관학교 재학 중 그는 [[김구]]와 적대적인 관계<ref name="am1">[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4035/1 국사편찬위 자료공개 "백범암살 배후는 미국"] 동아일보 2001년 09월 04일</ref> 였다 한다. 이 학교에 입교한 '한국 학생들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로 나눠져 있었는데 염동진은 이청천 계열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김구와 평소 사이가 나빴던 것<ref name="am1"/>'으로 알려졌다. 이때문에 김구가 암살되자 한때 [[김구]]암살의 유력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 해방정국 ===
==== 독립운동 참여와 민족혁명당 활동 ====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한 후 약탈과 부녀자 겁탈 등 만행에 반발하여 [[현준혁]]을 암살하였다. 이후 [[소련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월남하였다.
[[파일:Kim Kyu-sik.JPG|thumb|left|150픽셀|[[김규식]],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수였다.]]
[[파일:Kwb2.jpg|thumb|200px|right|[[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의 2인자 [[김원봉]], 염동진은 민혁당의 간부였지만 [[김원봉]]과도 별로 친하지 않았다.]]
 
서울로 월남한 염동진은 [[낙원동 (서울)|낙원동]]에 아지트를 두었고 대동단을 백의민족이라는 뜻인 [[백의사]]로 개칭했다. 효자동, 궁정동 등 서울 여러 곳에 아지트를 확장하고 단원들을 포섭하며 단원들도 서로 잘 알아보지 못하는 [[비밀결사]]로 맹렬한 반공주의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김일성]] 등 요인 암살을 시도하였고 백의사 단원들을 경찰계, 국방 경비대, 노동계 등에도 들여보내 반공운동을 하게 하였다.
{{본문|조선민족혁명당}}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난징|남경]]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이었지만 그는 당수인 [[김규식]]이나 당의 실세인 [[김원봉]]과는 소원한 관계였다. 그는 [[민족혁명당]]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6년]] [[2월 15일]]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을 [[김두한]]과 단원을 통해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박헌영]]을 납치시도 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1947년]] [[7월]]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사용한 권총을 제공했다.
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민족혁명당 간부당원 동정보고에 의하면 염동진은 어떠한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35년]] 겨울 [[민족혁명당]]조직에 반대하여 화북방면으로 간 것만 나올 뿐 이후 자료는 알 수 없다. 염동진의 생질 [[김종진]]에 의하면 이 무렵 그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간의 파벌싸움<ref>김구와 김규식, 김원봉 등의 민족혁명당, 사회주의 세력, 아나키즘 세력 등의 파벌 갈등</ref> 에 실망하여 동포들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하여 남경에서 만주 화북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좌익 노동운동에 대해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1947년]]에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염동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추어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남한에서 이런 우스꽝스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이후 그는 '요춘택'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했다. 그후 [[남의사]](藍衣社)에 들어갔고, [[1937년]] [[중일전쟁]] 후 [[중국]]군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하였다.<ref name="min1"/> 1936년 11월 시점에서도 수배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서울(G-2) 본부와 목단 지역에 사령부를 두어 1만 5천명의 사단 병력으로 구성되는 백의군 창설 계획을 세워 백의군을 창설하고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만주에는 이미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태로 실현은 하지 못했다.
=== 일제 강점기 후반 ===
==== 체포와 전향 논란 ====
[[미국]] 방첩대 CIC의 정보에 의하면 [[1937년]] 2월 산성진에서 누군가의 밀고로 중공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 정보부의 고문을 받는 와중에 눈이 멀었는데, 같은 나라 사람이자 당시 강력한 적이었던 사람에 의해 그들의 손으로 넘겨졌다.<ref name="dsa1"/> 고 한다.<ref name="dsa1"/>
 
[[웨더마이어]] 중장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염동진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을 두는 [[파시스트]]적인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라고 적혀있다. 실리 소령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다. "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하였다. 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라고 적혀 있다.
이후 염동진은 관동군에 협력했다고 하지만,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자료는 없다고 한다. 생질 김종진은 독립운동가들과 관련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 [[1940년]]경에 [[관동군]] 수용소에서 풀려난 31살 염동진은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평양직할시|평양]](平壤)으로 왔다.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는 [[관동군]]에 협력한 것이 그의 약점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관동군]]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료가 없어 그가 친일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정부수립과 만년 ===
[[1943년]] [[평양]]에서 대동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몇 명만 제외하고 여기저기 흩어졌다. 한편, 실리보고서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을 [[백범 김구]]의 암살배후로 지목하고 있으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 백찬옥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 또한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백범 김구]] 연구를 한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점차 [[조현병]]을 앓았고, [[1950년]] [[한국 전쟁]] 발발후 피난가기를 거부하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조선 인민군]]에게 불잡혔으나 생사여부는 알 수 없다.
==== 백의사 조직과 해방 ====
{{참고|대한민국 임시정부|남의사|백의사}}
[[1942년]] [[8월]] 그는 중국에서 국민당 특무기관이자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해 [[백의사]](白衣社)를 결성했다.<ref name="am1"/>
 
== 인물평 ==
이후 국내에 잠입한 염동진은 [[1943년]] [[평양]]에서는 대동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9월 [[소련군]]이 [[북조선]]에 진주한 후 [[소련]]군의 약탈과 부녀자 겁탈 등 만행에 반발하여, [[평양]]에서 [[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을 암살하였다. 이후 [[소련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월남하였다.
미국의 조지 실리 [[육군]] [[소령]]은 "분명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이란 평을 내렸고, "혹은 일반적으로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실리 소령은 보고서에서 그에 대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나 미국인과 인터뷰할 때는 통역을 활용해 신분을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의 소유자”라고 회고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4035/1 국사편찬위 자료공개 "백범암살 배후는 미국"]</ref>
그런데 [[현준혁]]의 암살을 치밀하게 사주한 끝에, 현준혁 암살 직후 배후가 드러나지 않았다. 현준혁이 암살되자 김일성과 장시우가 지목됨으로써 이들은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ref name="min1"/> 고 한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염동진을 두고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라며 하루하루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만 생각한 냉혈인간이라고 평가했다. 해방정국 혼돈 속에 염동진은 홀연히 사라졌지만, 그의 백색테러는 백주의 [[호열자]]처럼 퍼져나갔다고 덧붙였다.<ref>고은, 《[[만인보]]》 제20권 중 〈염동진〉, 창작과비평사, “1945년 겨울 서울 종로 2가에 염동진이 나타났다 아니 스며들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동지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몰랐다. 수군거리기를 중국 북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한다. 수군거리기를 가족 전부가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 한다.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 잠자리에서도 검은 안경 벗지 않는 장님 잠자리에서도 권총을 챙겼다. 청년 유진산은 머리였고 청년 김두한은 주먹이었다. 모자 벗은 머리에서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냉혈인간 그의 말은 칼끝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그의 하루하루는 누구를 죽이는 일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홀연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ref>
=== 해방 이후 ===
==== 월남과 광복 직후 ====
[[파일:Kim Gu (1947).jpg|thumb|right|150px|[[김구]], 그는 군정기 당시 김구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였고, 그와 함께 정변을 기도하나 실패한다.]]
 
== 주석 ==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한 후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약탈과 부녀자 겁탈 등 만행에 반발하여 [[현준혁]]을 암살하였다.{{출처}} 이후 [[소련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월남하였다.
 
서울로 월남한 염동진은 [[낙원동 (서울)|낙원동]]에 아지트를 두었고 대동단을 중국에 [[남의사]]를 본떠 [[백의사]]로 변경하였다. 이후 효자동 궁정동 등 아지트를 마련하며 단원들을 포섭하며 맹렬한 반공주의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김일성]] 등 요인 암살을 시도하였고 백의사 단원들을 경찰계, 국방 경비대, 노동계 등에도 들여보내 반공운동을 하게 하였다.
 
[[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옥구 비행장을 거쳐 귀국했다. 이후 그는 [[김구]], [[신익희]]와 재회했고 이후 [[김구]]의 정치적 노선을 지지한다.
 
김구의 집단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다른 정치집단들은 그렇지 않았다.<ref>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서각, 2001년판) 254</ref> 이후 중경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의 세력은 백의사로 흡수되었고, 백의사는 임정의 특무기관으로 활동한다.
 
[[12월]] 그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한다. [[12월 30일]] 무력의 반탁 운동을 자제해줄 것을 촉구한 [[한국민주당]] 당수 고하 [[송진우]](宋鎭禹)가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유근배]] 등 [[백의사]] 단원 5명에 의해 암살된다. 이후 백의사가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그는 미군정청으로부터 배후로 의심받는다.
 
==== 해방 정국의 활동 ====
[[1946년]] [[2월 15일]] [[조선 공산당]]의 [[박헌영]]을 [[김두한]]과 단원을 통해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박헌영]]을 납치할 계획을 시도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이후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까지 겹치게 되자 그 해 가을에 월북하였다. [[박갑동]]은 [[박헌영]]의 월북을 [[김일성]]의 인질로 표현했다. [[1947년]]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을 암살하였다. [[1947년]] [[7월]] [[여운형]]을 암살하는 데 사용한 45구경 권총을 암살범들에게 제공<ref name="min1"/> 하기도 했다.
 
그는 좌파 노동운동에 대해 매우 경계했다고 하며 [[1947년]] 말에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염동진의 생각이 분명하게 들어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추어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남한에서 이런 우스꽝스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으며 서울(G-2) 본부와 목단 지역에 사령부를 두며 1만 5천명의 사단 병력으로 구성되는 백의군 창설 계획을 세웠으며 백의군을 창설하고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만주에는 이미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태로 실현은 하지 못했다.
 
또한, 염동진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을 두는 [[파시스트]]적인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웨더마이어 중장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 실리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다. "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하였다. 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 생애 후반 ===
==== 단정 수립과 몰락 ====
이후 [[김구]]가 [[남북 협상]]에 참여하게 되면서 [[김구]]와 그를 따르던 [[한국독립당]]은 몰락했고, 염동진과 그가 이끌던 백의사 역시 서서히 몰락한다. 또한 정치 테러는 좌파 외에도 우파 내에서도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국민들은 이들을 위험한 단체로 보면서 그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확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몇 명만 제외하고 여기저기 흩어졌다. 한편, 실리보고서는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며 염동진을 [[백범 김구]]의 암살배후로 지목하고 있으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 백찬옥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 또한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이무렵 그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쿠테타를 계획한다. [[미국]] 첩보기관의 정보에 의하면 그는 김구와 함께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테타에 가담했다. 한때 염동진은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ref name="go1"/> 그러나 [[미국]]군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그 민간인(염동진)은 스스로 김구의 개인적 친구라고 말한다” “염동진의 추종자(백의사) 대부분은 김구씨의 추종자<ref name="qudeta1"/> ” “염씨는 김구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으며, 염씨는 한국군 내부의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노릇을 해왔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군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ref name="qudeta1"/>”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염동진은 스스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부를 원하고 있는 일종의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ref name="qudeta1"/>
[[백범 김구]] 연구를 한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
==== 최후 ====
염동진은 [[1949년]] 말부터 [[정신분열증]]을 앓았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나자 염동진은 피난가기를 거부했다고 하며<ref>다른 청년단체 지도자들 처럼 정보가 그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ref>, [[서울]] 체류 중 [[조선인민군]]에게 납북되었으나 이후 생사불명이다.
 
=== 사후 ===
중국 내에서 낙양군관학교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나, 군정기 당시 반사회적 범죄 조직을 이끌고 있었으므로 [[1963년]]과 [[1977년]]의 독립운동가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되었고, 이후 그는 잊혀졌다. 또한 [[한국 전쟁]] 당시 월북되고 유족들 역시 뿔뿔이 흩어지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소홀한 편이었다.
 
== 사상과 신념 ==
염동진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을 두는 [[파시스트]]적인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웨더마이어 중장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 실리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다. "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하였다. 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이러한 신념을 가졌다.
 
== 김구와의 관계 ==
염동진과 [[김구]]와의 관계는 복잡하였다. [[김구]]는 그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특별한 존재이기도 했다.
한인반 학생들이 [[이청천]]파와 [[김구]]파로 나뉠 때 그는 이청천을 지지<ref name="am1"/> 하여 낙양 군관학교 재학 중에는 김구와 갈등하였고<ref name="am1"/> 이후 [[이청천]]의 파벌이 남목청 회의 이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면서 그 역시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김구의 밀고로 [[중국 공산당]]에 넘겨져 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미국]] 정보부의 3급 기밀 문건에 의하면 그는 중국공산당 정보부의 고문을 받는 와중에 눈이 멀었는데, 같은 나라 사람이자 당시 강력한 적이었던 사람에 의해 그들의 손으로 넘겨졌다.<ref name="dsa1">[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동아일보 2001년 09월 04일자</ref> 고 한다. 그리고 염동진을 [[중국 공산당]]에 밀고한 것은 바로 '그배신자는 오늘날 가장 막강한 한국 정치인 중의 하나이며, 가장 사랑 받는 한국 애국자의 한 사람인 [[김구]]<ref name="dsa1"/>'였다. [[미군]]의 보고서는 염동진을 배신한 배신자가 김구 라며, 김구를 배신자<ref name="dsa1"/> 로 지목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ref name="dsa1"/> 을 지적했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ref name="dsa1"/>
김구에게 악감정과 원한을 가졌으면서도 그를 사적으로는 친구이자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특수한 관계였던 그는 [[김구]]와의 충돌 때문에 한때 김구의 암살 배후로 몰리기도 했다.
=== 김구와의 비밀 연락 ===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다. 염씨는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역할을 해왔다.<ref name="dsa1"/> 그러나 어느 날 염동진이 [[김구]]에게 국군 내 비밀자료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빼돌려져 [[미군]] CIC 방첩대에 보고되기도 했다.
염동진이 김구에게 알선해준 이 대한민국 [[국군]]내 파벌은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name="dsa1"/>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ref name="dsa1"/>
한 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이 문건이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미군에) 발견되었다.<ref name="dsa1"/>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 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이루어졌다.<ref name="dsa1"/>
=== 만주 폭격 계획 ===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계획을 세우고 합의하였다.<ref name="min1"/> 만주계획은 1947년 말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이었다. 이때 [[김구]], [[이청천]], [[이범석]]<ref name="min1"/> 등은 북한을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김구 등은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을 무력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전에서 [[장제스]]의 중국 군대와 동맹해 한·중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종국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멸한다.<ref name="min1"/>'는 것이었다. 즉 남·북·만주가 포함된 이 계획은 한국·중국·미국의 동아시아 삼각 반공 군사 동맹 체제의 수립<ref name="min1"/>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조직원들이 떨어져나가면서 타격을 받았고, 이후 김구의 암살로 만주 폭격 계획은 백지화된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염도열(廉道悅)
* 어머니 : 미상
** 형 : 2명
** 누이 : 염씨
*** 외조카 : 김종진
* 처 : 이름 미상, 생사 불명
 
== 평가와 비판 ==
=== 긍정적 평가 ===
[[미국]]에 보내는 기밀문서를 작성한 [[조지 실리]] [[미국]] [[육군]] [[소령]]은 "분명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ref name="min1"/>"이란 평을 내렸고, "혹은 일반적으로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용감한 한국인<ref name="min1"/>"이라는 인물평도 덧붙였다.
 
실리 소령은 보고서에서 그에 대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나 미국인과 인터뷰할 때는 통역을 활용해 신분을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의 소유자”라고 회고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4035/1 국사편찬위 자료공개 "백범암살 배후는 미국"]</ref>
 
=== 부정적 평가 ===
해방 정국에서 그의 휘하 조직인 [[백의사]]는 [[여운형]] 암살(1947. 07. 19), [[장덕수]] 암살(1947. 12. 08)을 지휘했다. 따라서 그는 테러리스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염동진을 연기한 배우들 ==
* [[이대로]] - 《[[야인시대]]》([[2003년]]) [[SBS]] [[텔레비전 드라마|드라마]]
 
== 각주 ==
<references/>
 
== 같이참고 보기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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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3}}
* [[백의사]]
* [[남의사]]
*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
* [[대동청년단]]
* [[조선민족청년단]]
* [[대한민주청년동맹]]
* [[테러리즘]]
* [[파시즘]]
* [[김두한]]
* [[김구]]
* [[김규식]]
* [[김원봉]]
* [[한지근]]
* [[한현우]]
* [[유근배]]
* [[박광옥]]
* [[염온동]]
* [[민필호]]
* [[박헌영]]
* [[방응모]]
{{Col-3}}
*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 [[한국 광복군]]
* [[한국독립당]]
* [[서북청년회]]
* [[백민태]]
* [[신익희]]
* [[배희범]]
* [[유진산]]
* [[안두희]]
* [[윤치영]]
* [[이승만]]
* [[장준하]]
* [[장제스]]
* [[현준혁]]
* [[여운형]]
* [[송진우]]
* [[안재홍]]
* [[범죄]]
* [[마이클 콜린스]]
* [[말콤 엑스]]
{{Col-3}}
* [[정치 테러]]
* [[한국 전쟁]]
* [[서북청년단]]
* [[대동청년단]]
* [[88구락부]]
* [[김재규]]
* [[안두희]]
* [[장덕수]]
* [[이청천]]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장택상]]
* [[조만식]]
* [[조병옥]]
{{Col-end}}
 
== 참조 자료 ==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46100000&pagesize=15&pagenum=4&cornerFlag=0&ContentTypeID=1 비밀결사 - 백의사] [[문화방송]] 2002년 1월 20일 방송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824 미 육군 문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 - 민족21] 2001년 10월 1일자
* [[도진순]]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1.html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신동아]] 2001년 10월 1일 (통권 505 호) 302 ~ 314 쪽 작성
 
== 참고 문헌 ==
<small>
*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999)
*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한국사연구총서 1)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역, 돌베개, 2006)
*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3)
* 김삼웅,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창, 2004)
*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 역사문제연구소,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 1993)
*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small>
 
[[분류:1902년 태어남]]
[[분류:몰년 미상]]
[[분류:대한제국선린인터넷고등학교 사람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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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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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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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평양직할시 출신]]
[[분류:살해된 사람]]
[[분류:의문사한 사람]]
[[분류:파주 염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