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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남경에서 활동하였다. 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민족혁명당 간부당원 동정보고에 의하면 염동진은 어떠한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35년]] 겨울 [[민족혁명당]]조직에 반대하여 화북방면으로 간 것만 나올 뿐 이후 자료는 알 수 없다. 염동진의 생질 김종진에 의하면 파벌싸움에 실망하여 동포들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하여 남경에서 만주 화북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1936년]] 2월 산성진에서 [[일본 관동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고문으로 눈이 멀어졌다고 한다. 이후 염동진은 관동군에 협력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자료는 알려진바 없다. 한편, 생질 김종진은 독립운동가들과 관련은 없었다고 말한다. [[1940년]]경에 [[관동군]]에서 풀려난 31살 염동진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목포대학교]] 정병준 교수는 [[관동군]]에 협력한 것이 그의 약점이자 출발점이라고 주장하지만, [[관동군]]에 체포된 후 자료가 없어 그가 친일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언론인 [[홍찬식]] 수석논설위원은 1937년 일본군에 붙잡힌 후 일본 첩보원이 됐다는 일부 증언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구체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체포된 뒤 고문을 당해 시력을 잃은 탓에 일본이 그를 써먹지 못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1940년대 초 그가 평양의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서 활동한 것도 ‘밀정설(說)’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그의 활동 공백만으로 장기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그를 민족 배신자로 모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평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50812/72998793/1 홍찬식 칼럼 영화 ‘암살’의 역사 왜곡] 김원봉 치켜세우고 독립운동과 친일 이분법 구도 “변절의 나라” 등 편향적 인식에 악용될 우려 공동체 의식 확인은커녕 서로 으르렁대는 광복 70년 올해도 못 바꾸고 넘어가나 2015년 8월12일 동아일보</ref> 진보성향의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 기준은 선 친일 후 항일은 항일이라고 말한바 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53229 "친일파에게 명예까지 갖게 할 수는 없다"] 오마이뉴스 2014년 11월 14일</ref>
 
[[1943년]] [[평양]]에서 대동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C%EB%8A%94_%EB%A7%90%ED%95%A0_%EC%88%98_%EC%9E%88%EB%8B%A4 이제는말할수있다 비밀결사 백의사] [[MBC]] 2002년 1월 20일 방송분</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