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방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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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房)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요임금|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지명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
 
[[당 태종]] 때 재상인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 578년 ~ 648년)의 둘째 아들이며, [[당 태종]]의 부마도위인 방준(房俊)이 [[634년]]([[당 태종]] 정관 8, [[고구려]] [[영류왕]] 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당나라]] 8학사 중 한 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동래하여 당성(唐城:[[경기도]] 남양)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정착하면서 남양 방씨(南陽 房氏)의 기원이 되었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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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방서란]](房瑞鸞) : 고려 중기 문신. 선주(宣州)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출신이다. [[1176년]](명종 6년)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는 데 기여하여 형 방효진(房孝珍)은 산원(散員)에 오르고, 방득령(房得齡)은 선주 호장(戶長)에 임명되었다.
* [[방사량]](房士良) : 고려 후기 문신. 상호군(上護軍) 방주(房柱)의 아들. 공양왕1377년(恭讓王고려 우왕 3년)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전의시승(典醫寺丞)을 지냈다. [[1391년]](고려 공양왕 2년) 중랑장으로서 시무 11조를 올리고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임명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1113 《고려사절요》 제35권]</ref>
* [[방구행]](房九行, 1380년 ~ ?) : 조선 초기 문신. 1420년(세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1455년(세조 2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 [[방구달]](房九達) : 조선 초기 문신. 1414년(태종 14년)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이조좌랑(吏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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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귀온]](房貴溫, 1465년 ~ ?)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금서(錦西). 직제학 방사량(士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성(九成)이고, 아버지는 사정(司正) 계문(戒文)이며, 어머니는 정존(鄭存)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진사가 되고, 1517년(중종 12) 전라도관찰사 조원기(趙元紀)로부터 마음을 돈독히 하며 바른 일에 철저하여, 효행이 지극한 자로 장계가 올려져 1518년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519년]]([[조선 중종]] 14) [[현량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상소로 인하여 신원(伸寃)되었다. 벼슬은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 [[방응현]](房應賢, 1524년 ∼ 1589년) :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준부(俊夫), 호는 사계(沙溪). 조식(曺植)·이항(李恒)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향리의 사계천(沙溪川) 위에 집을 짓고 일생을 송시(誦詩)와 독서로 자적(自適)하는 가운데 과농(課農)·이포(理圃)·관개(灌漑)·화죽(花竹) 등 농학분야의 생리문제(生理問題)에 관심을 두었다.
* [[방응청]](房應淸) : 중직대부(中直大夫) 전행예산현감예산현감(前行禮山縣監). 외손자는 예조정랑 [[하응림]].
* [[방복령]](房復齡, 1562년 ∼ ?) :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중(與中), 호는 구일(九一). 방응청의 손자로, 아버지는 1546년(명종 1년) 생원시에 급제하여 정3품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된 계운(季雲) 방덕린(房德麟)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호위하여 선전관(宣傳官)에 특채되었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나 선전관청(宣傳官廳)의 현판을 썼다. 1601년(선조 34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습독관(訓練院習讀官)‧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제주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고, 강상현감(康翔縣監)을 지내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정사가 혼란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 [[방원진]](房元震, 1577년 ~ 1649년) :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이성(而省), 호는 만오(晩悟). 부인은 현감 [[정대민]](鄭大民)의 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撲)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다. 1605년(선조 38년) 28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신흠(申欽)의 천거로 중림 찰방(重林察訪)이 되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군사와 군량미를 모집하였다.
* [[방원량]](房元亮, 16세손)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후잠(后潛), 호는 만회(晩悔). 참판에 증직된 방덕유(房德騟)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년)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과천에서 적을 물리쳤다. 1638년(인조 16년)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가 되었다., 1641년(인조 19년) [[의금부]] [[도사 (동음이의)|도사]](都事), 1642년 창평 [[현령]](昌平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첫째 부인은 [[함평 이씨]](咸平李氏) 이득원(李得元)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영의정]] [[황희]](黃喜)의 6세손 [[황진 (1550년)|황진]](黃進, 1550년 ~ 1593년)의 아들인 교동현감(喬桐縣監) 황정열(黃廷說)의 둘째 딸이다.
* [[방원정]](房元井, 1593년 ∼ 165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이정(而淨)이고, 호는 지족와(知足窩). 부친 방덕화(房德驊)와 모친 부사(府使) 양홍손(楊洪孫)의 딸 [[남원 양씨]](南原 楊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오정길(吳廷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분개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주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淸州)에서 적을 격파하고 과천(果川)에 이르러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적을 무찔렀으나 강화 소식이 전해지자 의병을 파하였다. 1646년(인조 24) 문과에 급제한 후 삼례찰방(參禮察訪)에 임명되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국가의 시장정책(市場政策)의 허점을 지적하며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외교정책(外交政策) 등 다방면에 깊은 식견을 지녔으며, 저서로 『지족와집(知足窩集)』 2권 1책이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691&cid=46649 방원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 [[방진형]](房鎭馨, 1869년 ∼ 1919년) :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