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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탄생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와 한강변 등에서 활약하였고, 이어 [[조선 선조|선조]]가 피란한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남해시남해군|남해]]현감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노력하였다. 남해 앞바다에서의 전투에서는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의 곤경을 구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도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
그는 이순신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1600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하였다. 이어서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황해도병마절도사]] 재임 중인 [[1615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