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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과 음악에 많은 관심을 지녔던 그는 파리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의사가 되지는 않았다. [[장 자크 루소]]를 만나 함께 식물을 채집하게 되며, 다른 과학에도 관심을 지니면서 특히 식물학에 집중하여 [[쥐시외]]와 함께 연구했다. 일부 동료 가운데 특히 [[고정설]](fixsme)의 지지자였던 [[퀴비에]]에 맞서야 했으며, 정치권력에도 그리 밝지 못했다. 혁명 사상을 지지했던 그의 정치적 시각은 제정기나 왕정복고 당시의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1778년]] [[뷔퐁]]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식물지> 3권을 출판하여 호평을 받았다. 라마르크는 [[공화제]]를 지지하여 왕립 식물원 개조의 중심이 되고, [[1793년]] 스스로 그 후신인 파리 식물원에서 무척추동물 담당교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본격화한 무척추동물 연구에서 〈동물철학〉을 낳았다. 라마르크는 자주 [[무신론자]]라는 공격을 받았는데, 그는 영적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 관하여는 상호부조가 공중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한다.
1781-~1782년 독일·헝가리 등지를 여행한 후, <식물 사전>을 출판하였다. 그 후 1815-~1822년, <무척추 동물지> 7권을 출판, 고대 무척추 동물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