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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士大夫)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사회지도층이다. <ref name="사대부">《한국고중세사사전》, 신진사대부, 한국사사전편찬회 편집, 가람기획(2007년)</ref>
 
== 배경 ==
사(士)란 독서인을 말하며, 대부(大夫)는 정치인을 말하는 것으로, 사대부란 학자적 관료 또는 관료적 학자를 말한다. 본래 사대부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군주|왕]]·제후(諸侯) 아래서 벼슬을 하여 정치 실무를 장악하며, 세습적으로 영토를 가진 치자계급(治者階級)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주로 현직·퇴직 관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지식 계급을 의미한다.
 
사대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은 무신집권기였다.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문신을 몰아낸 뒤 그 행정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방의 행정을 담당했던 토착세력을 등용했고, 이에 그 상층부였던 향리층이 과거를 통해 상당수 중앙으로 진출, 「능문능리」의 새로운 관인층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무신정권에 의탁한 진출이었기 때문에 독자적 정치세력을 이루지 못했고, 일부는 원 간섭기에 [[권문세족]]으로 성장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시기가 [[고려말]]까지 백년이 이어졌다. <ref name="사대부"/>
 
== 한국의 사대부 ==
[[한국]]에서 사대부는 [[고려]] 말, [[조선]] 때의 [[성리학]] 즉 [[주자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 학자적 관료를 말한다.
 
[[고려]]의 귀족정치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관료층인 사대부는 [[무신정권|무인 정권]]이 타도된 이후 더욱 활발히 정치적인 진출을 하였다. 사대부들은 중앙관부의 이직자(吏職者) 중에서도 나왔지만 그보다도 지방의 향리들 중에서 나왔다.
 
향리 출신의 이들 사대부는 곧 재향 지주(在鄕地主)이기도 하였다. 지방의 중소 지주인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를 거쳐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나서 향리(鄕里)에서의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들의 사회적 진출은 드디어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변화시켰던 것이다.<ref name="사대부"/>
 
=== 신진사대부 등장 ===
신진사대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시기는 [[고려말]]이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간섭기에 들면서 신진세력은 원나라를 통해 주자학을 도입하고 국학을 중심으로 이를 연구,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가 충선왕·충목왕·공민왕 등이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을 누르고 개혁을 시도할 때 그 측근세력으로 개혁에 참여하면서, 권문세족과 대립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권문세족]]에 의해 개혁이 저지되어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특히 [[공민왕]]의 개혁 때 형성된 개혁세력은 조선건국세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이들은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농장을 확대해가는 권문세족과는 이해관계가 대립되었다. 또 권문세족이 부재지주였던 데 비해 자신의 토지를 직접 경영했기 때문에 생산력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고려 말 중국의 강남농법의 도입으로 농업기술의 급진적 발전을 가져온 것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신진사대부가 권문세족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데 이론적 무기로 사용한 것은 [[성리학]]이었다. 이때 수용된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한차례 여과된 것으로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신진사대부들은 실천윤리를 중심으로 의리론·명분론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에 입각해 가장 먼저 공격했던 것은 불교의 비현실성과 승려들의 무위도식이었는데, 불교에 대한 공격은 불교와 일체가 되는 당시 권문세족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 이렇게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권문세족과는 사회적·경제적·사상적 입장을 달리했고, 고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권문세족의 기반인 정치 및 토지의 개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이후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사전(私田)의 개혁과 새 왕조의 수립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급진개혁파와 온건개혁파로 나뉘며, 급진개혁파가 사전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 [[과전법]]을 마련하고 조선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ref name="사대부"/>
 
=== 성리학과 주자학의 구분 ===
주자학과 성리학은 어떤 관계일까? 흔히 주자학이라 부르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성리학의 일부이다. 성리학(性理學)은 원래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성리학은 신유학(新儒學), 이학(理學),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으로 불렸고 [[중국]] 송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새로운 사상체계로 성립되었다.
 
[[당나라]] 말과 [[송나라]] 초기를 거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중국]]의 사대부들은 이전의 유학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주론, 존재론,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유학을 재해석하였다. 유학(儒學)을 발전사적으로 볼 때 선진(先秦)의 본원(本源) 유학, 한당(漢唐)의 훈고(訓詁) 유학, 송명(宋明)의 성리학, 청(淸)의 고증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선진유학(先秦儒學), 한당유학(漢唐儒學) 등 시대에 따라 나눌 경우 바로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유학]](儒學)을 가리켜서 성리학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대표적 학자와 경향에 따라 성리학은 다양한 명칭이 있는데 육왕학(陸王學), 양명학(陽明學), 도학(道學), 심학(心學)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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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사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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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