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레이 스티븐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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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evenson and Korean officials at USAF base in Korea, March 1953-cropped to Stevenson.jpg|thumb|애들레이 스티븐슨<br />(1953년 대한민국 방문)]]
{{다른 뜻|애들레이 E. 스티븐슨|20세기 중반 미국 대통령 후보|19세기 후반 미국 부통령인 그의 조부}}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lang|en|Adlai Ewing Stevenson II}}, 1900년 2월 5일 ~ 1965년 7월 14일)는 [[미국]]의 정치인이다. 1952년과 1956년 [[미국의 대통령|대통령]] 선거에 출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이름이 같은 그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조부]]는 1893년 ~ 1897년 [[미국의 부통령|부통령]]을 지낸 유력한 정치인이며, 부친도 [[일리노이 주]] 주정부에서 일한 공직자였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기반을 둔 [[일리노이 주]] [[블루밍턴 (일리노이 주)|블루밍턴]]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22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영문학과 역사학 전공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로 진학했으나 법학에 흥미를 못 느낀 그는 많은 과목들을 낙제하고 중퇴했다. 그러나 그는 1년후 [[올리버 웬들 홈스 2세]] [[미국 연방대법원|대법관]]과 얘기를 나눈 후 법학에 대한 흥미를 되찾았고 [[노스웨스턴 대학교 법학대학원|노스웨스턴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하여 법학 공부를 재개하여 1926년 법학 학사(LL.B.) 학위를 취득하고 일리노이 주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후 [[시카고]]에서 시들리 오스틴 [[로펌]]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공직에 진출하였고, [[공화당 (미국)|공화당]]이 우세하던 당시 중서부에서 1930년대와 1940년대 당시 집권 정당이던 [[민주당 (미국)|민주당]]의 유력 인사로 떠올랐다.
 
1941년 ~ 1945년 해군장관 보좌관, 1945년 [[미국 국무부|국무장관]]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 사이 [[유럽]] 구호 지원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특별 사절단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연합]] 총회에 미국 대표단 고문으로 참석했다. 1948년 일리노이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공화당 후보를 큰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그 다음해부터 주지사로 재직하며 주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전쟁영웅인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후보에게 큰 차이로 패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재차 출마했으나, 다시 아이젠하워에게 패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나, 예비선거에서 [[존 F. 케네디]]에 밀려 후보로 선출되지 못했다.
 
그 후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그를 국제 연합 대사로 임명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UN 대사로 재직하며 [[쿠바]] 문제, [[소련]] 문제, [[아프리카]] 신생국 대립 문제 등의 국제 분쟁 해결에 기여했다. 1965년 [[영국]] [[잉글랜드]] [[런던]]을 방문했다가 [[심근 경색]]으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정력적인 활동과 뛰어난 언변으로 미국에서 크게 기억되고 있는 정치가이다. 이름이 같은 그의 아들도 대를 이어 정계에 진출, 연방 상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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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s|Adlai Stevenson}}
 
{{토막글|정치인|미국 사람}}
 
{{기본정렬:스티븐슨, 애들레이}}